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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책다락
  • 버진 수어사이드
  • 제프리 유제니디스
  • 13,500원 (10%750)
  • 2025-02-07
  • : 8,862



언제였을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올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때가. 내일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어쩌면 오늘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때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 때가. 그런데도 여전히 살고 싶고, 하루라도 더 살고 싶고, 죽은 사람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왜일까. 이렇게 음울한 생각을 하게 된 건, 미국 작가 제프리 유제니디스가 1993년에 발표한 첫 장편 소설 <버진 수어사이드>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197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를 배경으로 한다. 이곳에는 리즈번 가(家)의 아름다운 다섯 자매가 살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매들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을 바라보듯 경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다섯 자매의 막내 서실리아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려 한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서실리아는 목숨을 건졌지만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야 한다. 다른 자매들은 부모로부터 전보다 더 심한 통제를 당한다. 이웃들은 그들 가족의 머리 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한다.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소설이 리즈번 가의 이웃에 살면서 자매들을 관찰하는 또래 소년들의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관음적(변태적?)인 설정 때문에 내용에 몰입하기 어려웠다는 독자들도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이 설정이 똑같이 어려도 남성에게는 상대방을 능동적으로 볼 수 있는 권력이 주어진 반면, 여성에게는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위치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그 시대의 한계를 보여주는 장치라고 느꼈다. 소년들은 자신들이 자매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누구보다 그들의 일상에 대해 잘 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자매들의 진정한 이해자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식의 오해 내지는 착각도 남성 권력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특징은, 그래서 결국 자매들이 왜 죽었는지에 관해 명확히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체로 우울증이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생각에 작가가 우울증의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우울증을 야기하는 사회적 요인(가족, 친구, 연애, 이웃, 사회, 문화, 경제, 정치 등등)을 조금씩 언급하면서, 이러한 요인들이 그 사회 내부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에게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가 자살임을 보여주려고 이 소설을 쓴 것 같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자매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가정은 불화하고 이웃들은 무관심하며 사회는 경직되고 경제는 무너지고 정치는 혼란스럽다. 이런 모든 요인들을 고려해 봤을 때 더 이상 살아 봤자 재미도 없고 희망도 없겠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살이 그저 개인의 선택일까, 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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