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의 가치 중 하나는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겨우 책 한 권 읽은 걸로 남의 삶을 다 안다고 자부할 수는 없지만, 남의 삶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는 걸 알기만 해도 좋은 독서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 황석희의 책 <번역: 황석희>를 읽으면서 든 생각도 그것이다.
출판 번역가도 독자들의 지적이나 비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출판에 비해 훨씬 더 시장이 큰 영화 번역 일을 하는 저자는 자신이 자막을 번역한 영화가 공개될 때마다 엄청난 지적과 비난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타당한 지적이라면 귀를 열고 듣겠지만, 대부분은 영어만 잘 알고 영상 번역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늘어놓는 자기 생각에 불과하다. 번역 또는 영상 번역에 대한 이해가 일반인들 사이에 퍼진다면 이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은 줄어들 터. 작품 뒤에 '숨어' 있어야 한다는 업계의 불문율을 깨고 저자가 직접 책을 집필하고 방송 출연도 주저하지 않는 이유다.
이 책은 번역 자체에 관한 이야기보다 번역가로 일한다는 것, 번역가로 산다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직업 분야에 관한 책인데도 잘 읽히고 재미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저자의 아내도 영상 번역가인데 저자는 자막 번역만 하는 반면 아내는 더빙 번역도 한다는 점이다. (더빙보다 자막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영화 번역 하면 자막 번역만 생각했지 더빙 번역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다. 자막 번역은 대사를 최대 두 줄, 한 줄에 열두 자 안으로 축약하는 것이 관건이라면, 더빙 번역은 원문의 음성 길이에 맞추어 대사를 번역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영어를 그냥 듣고 말하는 것도 버거운 내게는 두 분 다 초능력자 같다.
팬데믹과 OTT 서비스 보급 이후 영화 시장이 침체 되면서 영화 번역이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영화 번역 일이 줄면 OTT 쪽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시스템 자체가 다르다고. 아이가 태어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이가 나오거나 아버지에 관한 영화를 대할 때 마음가짐이 다르다는 대목도 공감 되었다. 이유는 다르지만 같은 맥락으로 못 보는 영화나 드라마, 책이 나에게도 있으므로. 황석희 번역가의 두 번째 책 <오역하는 말들>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