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대 없이 읽은 책인데 너무 좋았다. 평범한 글쓰기 책일 줄 알았는데 예시로 등장하는 저자의 인생 이야기가 웬만한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흥미롭고 감동적이라서 한 번에 끝까지 읽어버렸다. (참고로 이 책은 356쪽이다.) 이 책은 가이드북 형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단 한 번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처음으로 돌아와 그 때부터 목차에 따라 글쓰기를 해볼 것을 권한다. 아마도 그 때는 저자와 책에 대한 인상이 사뭇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저자 낸시 슬로님 애러니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교사로 일하다가 조엘 애러니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저자의 삶은 괜찮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고 열다섯 살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아직은 견딜 만한 시련이었다. 저자의 인생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 댄이 생후 9개월 만에 당뇨병 진단을 받고 스물두 살 때 다발성경화증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식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일은 어머니인 저자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당시만 해도 다발성경화증에 대한 책이나 치료법을 아는 의사를 만나기 어려웠기 때문에 돈과 시간도 많이 쓰고 가세도 점점 기울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왜 하필 내 자식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알고 싶어도 물어볼 대상이 없다는 것이었다. 괴로워하던 저자는 방법을 찾고 또 찾다가 글쓰기를 시작했다. 나에게 필요한 책이 없으면 직접 쓰면 된다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그런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저자는 자신의 일상을 조금씩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간병 초기에 저자는 모든 일이 그저 싫고 힘들고, 매 순간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쓰기를 하면서 저자는 아무리 싫고 힘든 일이라도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있는 소중한 시간이고, 언젠가는 이 시간도 그리운 추억으로 기억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같은 원리로 저자는 자신의 인생도 조금씩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 또는 사별, 실직, 우울, 불안 등 불행한 일로만 점철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삶에도 좋은 순간이 있었고 배운 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 부서진 마음을 달래준 것은 정신과 의사도, 처방약도, 위로를 건네는 친구도, (심지어 내 남편처럼)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배우자도 아닌 자전적 에세이 쓰기였다. (11쪽)
자기 서사, 자전적 에세이를 쓰면 자신을 괴롭히는 감정의 원인을 보다 분명하고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정신적으로 불안과 고통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병을 낫게 하거나 예방하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 실제로 저자는 컬럼비아대학교 의학대학원의 내러티브 의학 프로그램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며 자기 삶을 서사화하는 경험이 그 자체로 문제 해결과 치유의 효과가 있음을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