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서련 작가의 소설을 읽고 너무 좋아서 한동안 다른 책을 못 읽은 적이 몇 번 있다. 처음은 박서련 작가의 데뷔작 <체공녀 강주룡>을 읽었을 때였고, 그 다음은 소설집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을 읽었을 때, 최근에는 장편소설 <폐월 : 초선전>을 읽었을 때다. 초선이 누구냐. 많은 사람들이 아는 <삼국지>의 바로 그 초선이다. <삼국지>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데다가 그 내용이 워낙 자극적이라서 <삼국지>의 다른 내용은 잊어도 초선이 나오는 대목만은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인데(=나), 바로 그 초선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심지어 의미도 있게 쓰다니. <삼국지> 전체를 다시 써주시면 안 될까요 ㅎㅎ
<폐월; 초선전>은 <삼국지>의 초선을 알아도 재미있지만, 몰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주인공 '나'는 가난 때문에 자식을 팔아넘기려고 하는 부모 슬하에서 도망쳐 거지떼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나라의 장군인 왕윤을 만나 거짓으로 자신의 신분을 고하고 왕윤의 수양딸이 되는 데 성공한다. 은인인 왕윤에게 보답하고 싶었던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관리가 되고자 했지만, 여자는 관리가 될 수 없다고 해서 여인으로서 관모에 손댈 수 있는 유일한 자인 '초선'이 되기로 한다. 그렇게 초선이 된 '나'는 양아버지를 구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걸 이용하기로 마음 먹는다.
줄거리를 쓰다 보니 초선과 왕윤의 관계가 수양딸과 양아버지이고 여포와 동탁의 관계가 수양아들과 양아버지로 서로 비슷한 점이 흥미롭다. 물론 초선은 아주 어릴 때 왕윤을 만났고 그때 이미 고아이고 거지였기 때문에 왕윤에게 받은 은혜가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느껴서 (동탁을 배신한 여포와 달리) 왕윤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은혜를 갚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왕윤이 초선을 이용한 면이 없지 않고, 왕윤이 진정 좋은 어른인지에 대해서는 초선 자신도 의심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결과만 봤을 때 동탁-여포의 관계보다 왕윤-초선의 관계가 훨씬 낫고, 그런 점에서 (남자들이 말하는) 남자들의 의리라는 게 얼마나 허술하고 위태로운지 생각해보게 한다.
<폐월; 초선전>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많이 발휘된 부분은 아무래도 초선이 낙양에서 가기(家妓)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왕윤의 집에서 외동딸로 살다가 처음으로 자기 또래의 여성들하고만 생활하게 된 초선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성적 욕망에 눈을 뜬다. 동탁과 여포라는 두 남성과 일종의 삼각관계를 이루었던 초선이 사실은 여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발견했다니 흥미롭지 않은가. 물론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이지만, 애초에 옛날 사람들이 다 이성애자였을 리도 없고, 남자와 자는 여자가 전부 이성애자인 것도 아니다. 그런 오해나 편견에 비하면 이런 상상쯤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