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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책다락
  • 유랑의 달
  • 나기라 유
  • 13,500원 (10%750)
  • 2020-10-28
  • : 1,596



나기라 유의 대표작 <아름다운 그>는 소설보다 만화로 먼저 접했다. <아름다운 그>는 흘음(말더듬증) 때문에 어릴 때부터 줄곧 친구가 없었던 주인공이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 무리의 리더 격인 남학생을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BL이다. 처음에는 학교 폭력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너무 낭만적으로 보고 미화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거부감이 들었는데, 계속 읽다 보니 개중에는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싶어서 원작 소설(무려 네 권)도 다 읽고, 실사판 드라마, 영화도 다 봤다. 논란이 있는 나기라 유의 소설 <유랑의 달>을 읽어볼 결심을 한 것은 그래서였다. 이 작가, 논란이 될 만한 소재를 설득력 있게 잘 쓴다 싶었다. 개중에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해서 전체가 그렇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고.


<유랑의 달>의 줄거리는 이렇다. 아홉 살 여자아이 가나이 사라사는 '외국인 같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생활 방식이 자유롭고 애정 표현이 적극적인 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언제까지나 세 식구가 행복하게 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병으로 죽고 엄마마저 다른 남자를 따라 떠나면서 혼자가 된 사라사는 이모의 가족과 살게 된다. 이모의 가족은 사라사의 가족과 정반대로 규율이 엄격하고 서로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다. 심지어 이모의 아들 즉 사라사의 외사촌 오빠는 사라사의 몸에 손을 대기까지 한다. 참다 못한 사라사는 학교 근처 공원에 자주 나타나 아이들 사이에서 '로리콘'으로 불리는 대학생 오빠 후미에게 자신을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한다. 사라사 자신도 설마 응할까 싶었는데 후미가 진짜로 사라사를 데리고 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로리콘' 즉 '롤리타 콤플렉스'를 다룬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직접 읽어보니 애매하다. 일단 사라사와 후미는 각각 아홉 살, 열아홉 살로 둘 다 미성년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결말쯤에 드러나는 후미의 사연과 이후의 전개를 보면 애초에 후미가 이성애자, 나아가 유성애자인지도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후미가 로리콘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도 힘들다. 이 소설은 대개 사라사의 시점으로 진행되는데, 사라사가 후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와 불안정했던 상태 등을 감안하면 사라사를 신뢰할 만한 화자로 보기 어렵다. 사라사가 후미를 지나치게 낭만화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스톡홀름 신드롬으로 볼 여지도 있다. 후미의 시점으로 서술되는 장면이 더 많았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같은 내용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다.


의심이나 가능성은 차치하고 소설에 있는 내용만 본다면, 이 소설은 (로리콘보다도) 이성애자 여성이 이성애자 남성을 사랑하며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한다. 금슬이 좋은 부모 슬하에서 자란 사라사는 하루 빨리 자신도 엄마 아빠처럼 서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기를 꿈꿨다. 하지만 사라사가 만난 (후미 이외의) 남성들은 하나같이 사라사를 성욕을 풀 대상으로만 보거나 살림 기계로 이용하고, 사라사가 거부하면 강간, 폭행, 스토킹까지 하면서 사라사를 괴롭혔다. 사라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기만 할 뿐 건드리지는 않는 후미 같은 남자는, 적어도 이성애자 남성 중에는 만나기 어렵다. 그러니 만남을 포기하거나 성애 가능성이 없는 남성(아이돌, BL, 만화 등등)만을 만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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