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때는 집에 사전이 여러 권 있었다. 국어사전, 영어사전, 백과사전 등 종류도 다양했고, 어른들이 보는 사전과 어린이들이 보는 사전이 따로 있기도 했다. 이제는 집에 사전이 한 권도 없다. 고등학교 때 구입한 샤프 영어사전을 끝으로 새로운 사전을 구입한 일이 없다. 인터넷이 보급되고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서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포털 사이트나 사전 앱에서 찾아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어른인 나도 이런데 요즘 아이들은 종이 사전을 사용할까. 종이 사전의 존재나 알까.
번역가 홍한별의 에세이집 <아무튼, 사전>은 사전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책이다. 저자는 종이 사전, 인터넷 사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전을 애용한다. 일차적으로는 번역가라는 직업 때문이다. 모르는 단어의 뜻을 찾거나 단어의 정확한 용례를 알기 위해 영한, 한영, 영영 등 여러 형태의 사전을 수시로 들춰본다. 작업 중이 아닐 때에도 끊임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단어들을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사전마다 특징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에 사전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다 보면 필요가 생겼을 때 이용할 수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번역가의 사전 사용법을 알려주는 책인가 싶은데, 후반부로 갈수록 사전에 얽힌 저자의 개인사가 담담히 펼쳐진다.
몇 해 전 작고한 저자의 아버지는 강원도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독학으로 영어 공부를 해서 서울에서 직장을 구하고 자식 둘을 영어 번역가로 키웠다. 저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평생 공부하는 분이었고 그중에서도 언어 공부에 관심이 많아서 영어 사전뿐 아니라 일어 사전, 불어 사전 등 다양한 사전이 집에 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후로 기억하는 단어의 수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자식으로서 그리고 언어가 삶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슬프고 두려웠을까.
그러나 언어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로 생겨나기도 하는 것처럼, 인간은 언어를 잊을 수도 있지만 새로 배울 수도 있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저자의 아버지는 "최초의 언어로, 번역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성경을 읽고 싶다"는 목표를 세우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어를 열심히 배웠다. 저자의 어머니는 텔레비전에 나온 단어 중에 모르는 것이 있으면 따로 적어뒀다가 뜻을 찾아보기도 하고, 고향인 전라도 사투리를 생각나는 대로 수첩에 적는 식으로 자신만의 사전을 만든다. 과연 나는 십 년 후, 이십 년 후, 오십 년 후에 어떤 단어를 알고 있을까. 지금 알고 있는 단어 중에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기억할 단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