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체코. 십 대 소년 밀로시 흐르마는 작은 기차역에서 일하는 철도 공무원이다. 밖에선 전쟁이 한창이라는데 밀로시가 사는 마을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에서 폭탄이 터지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실을 평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경험한 적 없는 사람에게는 끔찍한 상황이겠지만, 오랫동안 이렇게 살았던 마을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나면 그 틈을 타 욕을 하고, 비행기가 떨어지면 잔해를 주우러 갈 뿐이다. 밀로시 역시 삼 개 월 전 자해를 시도했지만, 그런 그를 걱정하는 이는 별로 없다. 다들 죽고 싶기 때문이다.
체코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이야기꾼들>은 여섯 편의 소설을 엮은 단편집이다. 맨 처음에 실린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가 특히 강렬했다. 1945년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체코에는 가본 적도 없지만, 전쟁이 일상인 밀로시의 삶이 어쩐지 친숙하게 느껴진 건, 한국도 정전 상태일 뿐이지 전쟁이 종료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밀로시가 사는 마을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이 터지고 비행기가 추락하는 건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살고 있을 터. 그렇다고 항상 전쟁에 대비하고 죽음을 걱정하는 건 아니고 오히려 더 물질적 향락이나 육체적 쾌락에 몰두하는 모습이 너무나 한국인들 같다고 느꼈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만 길이가 긴 편이고 나머지 다섯 편은 길이가 짧다. 다섯 편중에서 인상적이었던 소설은 <다이아몬드 눈>이다. 기차에 오르던 한 남자가 낯선 남자의 부탁을 받고 그 남자의 딸과 동행을 하게 된다. 벤둘카라는 이름의 소녀는 소란스러운 객실 안에서도 유난히 아름답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는다. 소녀의 이야기를 듣던 남자는 나중에야 소녀가 앞을 못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이 안 보이기 때문에 현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까, 아니면 눈이 보여도 현실의 아름다움을 못 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은 걸까. 짧은데 자꾸만 곱씹게 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