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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to0917님의 서재
  • 사람의 거짓말 말의 거짓말
  • 남재일
  • 16,200원 (10%900)
  • 2014-09-22
  • : 269

처음 이 책의 제목을 접했을 때 나는 조금 의아했다. 무슨 주제의 책인지,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책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던 탓이다. 다만 표지에서 부터 느껴지는 "새빨간 거짓말"의 단면만을 엿본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한 권의 책에 담아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논제들과 사례, 그것을 뒷바침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주장에 관한 인용 등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색다른 접근에 조금 놀라고, 많이 기뻤다.

사람이 말을 하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데, 사람이 뱉어내 세상에 나온 말이 또다시 거짓말을 한다.

우리는 기만의 사회를 살고 있다.

남재일 작가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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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에서 보듯, 사회 전반 측면의 문제들과 몇몇 논란의 소지가 있는 민감한 문제들(성매매, 사형폐지론, 동성결혼,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해 남재일 작가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좀 더 우리 삶에 밀접한 인문학을 접할 수 있다. 현학적인 문장들에 감탄하되, 그것이 곧 삶의 이면을 파고들어 때로는 불편할 정도로 본질을 파헤쳐 보여주는 솜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다양한 화두가 던져지는 만큼 누군가는 거기에 공감할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불편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대해 염증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임에는 틀림이없다.

마치 뇌에 맛있는 성찬을 대접해 사고가 몸집을 불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p.22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현대사회는 권력 작동의 패러다임이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이행했다고 단언한다. 성과사회는 '온순한 신체'대신 '욕망하는 신체', '복종적 주체'대신 '자발적 주체'를 생산한다. '성과주체'는 자유롭다는 확신 하에 끊임없이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하는 존재이다. .......(중략)........ 이런 식으로 성과와 보상 체계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고정시켜, 정형화된 판타지를 생산하는 권력 작동 방식이 '유혹의 정치'이다.

........(중략)....... 자유를 상상할 때조차 그는 성과로 돌아온다. "출퇴근에서 벗어나 해외여행을 다니며 하고 싶은 걸 하려면 역시 돈이 있어야 한다. 더 벌어야 한다." 성과주체는 꿈꾸는 삶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성과로 설정된 스타일 속에 감금돼 있다.

p.23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분노하지 않고 짜증낸다. 분노는 적을 향하지만 짜증은 자신의 무능을 향한다. 적대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을 창조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능력에 대한 강박과 무능에 대한 자각으로 지친다. 이 상태가 우울이다. 모든 것이 열려 있는데 능력이 모자라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우울등이 찾아온다. '허무'가 성취의 방법은 알지만 동기부여가 안 되는 상태라면, '우울'은 동기부여가 과도해 방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다. 허무가 규율사회의 소수 탈주자가 겪었던 마음 사태라면, 우울은 피로사회의 다수가 직면하는 심리적 현실이다.

이러한 유혹의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지배 없는 착취라고 작가는 말한다. 지배자가 지불할 지배 비용조차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완벽한 구조가 아닌가? 이 글을 읽는데 어렸을적 보았던 만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강아지의 목줄에 낚시대 같은걸 걸어서 강아지의 시야 약간 위쪽으로 먹이를 묶어 놓는 장면이다. 강아지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먹잇감에 안달을 내며 달려들지만 결국 강아지가 이동한 만큼 먹잇감도 이동하므로 그것은 결코 강아지의 몫이 되지 못한다. 한참을 그렇게 뛰다가 힘에 겨워 땅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다가, 다시 눈 앞에 보이는 먹잇감이 잡힐 것만 같아 다시 추격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의 인간들도 어쩌면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무슨 희망고문도 아니고, 차라리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을 아주 작은, 그렇지만 확실히 틈은 있는 가능성을 열어보이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더 채찍질하라고 말한다. 더 노력하면 가질 수 있을거라며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를 욕망하게 하는 어떤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치다가 원하는 것이 잡히지 않고 계속 가능성으로만 머무는 비참한 현실에 결국 비관적이 되어버린다. 가능성이 없다면 외부로 향했을 그 분노가, 가능성은 있었지만 내가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자기반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반복되면 나는 어느순간부터 나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 평가내린다. 그래서 우리들은 슬프다. 우리가 원하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때문에. 좀 더 노력하지 않는 자신, 재능없는 자신 때문에.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게 좋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해왔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 모든 것을 결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내보일만한 결과를 배출하지 못한 우리의 과정들은 괄시받는다. 우리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얼마나 했는지와는 무관하게. 그러나 우리 자신은 알고있지 않은가? 우리가 그것을 위해 바쳤던 열정과 지불했던 그 무수한 시간들을.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기준에 맞추어 생각하느라 어느 순간 자기 자신마저 속이며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길 바란다. '난 그래도 열심히 했어.' 라는 생각이 '난 정말 열심히 한 걸까? 더 노력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으로 변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하지만 무슨일에나 '더'라는 생각은 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것에 매달리면 늪에 빠진 것처럼 빠져나오기 힘들 것이다.

피로사회가 직면한 심리적 현실. 어쩌면 현대의 젊은이들 중 많은 수가 이같은 이유로 그저 백수 백조로 전락해 집에 틀어박힌 것인지도 모른다. 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요구 조건은 높아진 동시에 많아졌기 때문이다.

p.76

임금을 대폭 삭감해 얻은 이윤으로 교회의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임금 삭감의 이득은 다수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지만 가치중립적인 '경제적 행위'로 치부되면서 윤리적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반면 이렇게 남은 이득의 일부를 기부하면 선행으로 칭송받으며 단번에 윤리적 영예를 가질 수 있다. 계산에 밝은 인간이라면 어찌 이 방법이 가진 효율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겠는가.

지제크는 이런 형태, 다수의 이웃을 괴롭혀 남에게 조금 집어주고 윤리적 행위의 영예는 자신이 갖는 것을 '물질주의적 부인'으로 규정하며 강도 높게 비판했다. 희생과 헌신의 제스처만을 윤리적 행동인 것처럼 떠받들면서 이

웃의 진정한 고통은 없는 듯 부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어떻게 이 글귀를 파고들어 현재 사회의 문제와 하나로 엮어 생각할 수 있었는지. 할수만있다면 작가의 머릿속을 한 번 들여다보고 싶다. 얼마나 많은 책과 신문을 읽고 생각하고 고뇌해야 가능한 사고일까.

이 부분은 실제로 사례를 많이 엿볼 수 있는 상황이라 더 공감이 된다. 실제로 기업들에서 이런 경우가 많다. 멀리갈 것도 없이 몇몇 회사에서는 직원들에게 기부를 위한 모금을 요구하고 그것들을 모아 기업이 얼마간의 돈을 더 보탠 후 회사이름으로 기부하곤 한다. 회사는 자연히 인지도가 높아지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됨과 동시에 그것을 위한 비용은 절반정도로 해결한 셈이다. 당장 기름값, 식재료값, 아이 분유값등 다양한 물가가 올랐으나 월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삭감된 직원들의 고단한 삶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참으로 인정머리 없고 이해타산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이웃을 사랑하기는 커녕 한 가족안에서도 온갖 불화가 일어나는게 요즘의 사회인 것이다.

p.141

사회구성과 운용의 편리함이라는 실용적 가치를 위해 전체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를 배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후순위로 두는 윤리적 폭력이다.

사랑은 남녀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 남녀 사이에 존재한다고 혹은 존재해야 한다고 강변하는 일은 어쩌면 남녀 간 사랑을 내세워 이워지는 결혼에 부족한 것이 사랑밖에 없다는 무의식적 고백일지 모른다. 동성결혼에 대한 낯섦은 이성결혼에 내재한 사랑이 부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력관계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자의 부정을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권력은 반드시 타자에 대한 비교우위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정립할 수 있다. 이성결혼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동성결혼을 부정하지 않고도 존속하리라. 진정으로 이성결혼 제도를 옹호하는 자라면 동성결혼에 손가락질할 시간에 자신의 결혼을 사랑으로 채우는 일에 몰두할 것이다.

동성애는 논란이 끊이지 않는 주제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동성결혼에 대해서도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는 동성애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애를 하기에 그것이 좀 더 보편적 관념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사랑 그 자체를 두고 어느 누가 그것의 자연스러움이나 부자연스러움을 입증할 수 있을까. 나는 동성애도 그저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하면 아동성도착자같은 사람들과 동성애자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그럼 아동성도착자들의 사랑도 어디한번 사랑이라고 말해보라는 사람들이 꼭 있다. 하지만 아동성도착자같은 질환은 병의 일종이다. 동성애는 병이 아니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동성애가 정신적 병이라고 생각되었던 많은 학자들이 억지로 이것을 고쳐보려 했던 여러 사례에서 입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오해(성도착증 환자와 동성애자를 같은 취급하는 것)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동성애자가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이성애자들, 호모포비아들, 동성애자들, 또는 이도저도 아니고 휩쓸려가는 사람들 모두 그들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 알고 있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권리를 찾아줄 의향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인권단체에서 이같은 말이 나오면 하늘이 무너질 것처럼 역정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이 마치 하늘의 뜻을 거스르고, 온갖 죄악을 불러오기라도 할 것 처럼.

그러나 동성애와 이성애를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다면, 이성애를 택하지 않는 동성애자는 몇이나 될까. 괴롭힘 당하고 무시받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으니 사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것 하나는 동성애자가 더럽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은 그들의 사랑을 오로지 육체적, 그러니까 성적으로 보는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도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사회의 시선때문에 스스로가 동성애자임을 영원히 숨기고 이성과 위장 결혼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나 안타깝고 믿기 힘든 일이지만 현실에 벌어지는 일이다. 한 번 살고 가는 인생이건만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지도 못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야하다니. 대체 누가 그들에게 그런 삶을 살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글쓴이인 남재일 작가의 다른 저서가 궁금해 찾아보다가 누군가가 그의 책에 대한 평에 '밑줄긋기 훈련'을 시키는게 아니냐고 적어놓은 문장을 보았다. 그말대로다. 나는 원래 책을 읽을 때 밑줄을 치지 않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밑줄을 치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차라리 밑줄을 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줄을 치나 안치나 새책과 구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였다. (밑줄을 치지 않을 부분이 별로 없으므로)

자본가도 아니면서 자본가의 눈을 가진 외눈박이들을 위한 비평적 에세이


전세계의 부의 90%는 단지 10%에 불과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우리 대다수는 부를 소유한 자본가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즉, 지배자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에 만연한 관념들, 현상들, 그것들이 만들어진 이유와 그것이 불러올 영향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끌려간다. 혹은 그속에 자리한 불평등과 어쩔 수 없는 부조리를 느낄지언정 자신은 다르다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낮은 확률에 매달려 허덕이거나. 자본가는 자본가의 눈을 하고 있는데, 가진게 없는 사람들조차 그것이 정석인냥 그들의 눈을 통해 사회를 바라본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객체화하여 멀찌감치 떨어트려놓고 보이지않는 손처럼 자신을 채찍질하는 무수한 지배자들을 위해 현실에서 고통받는 우리 자신을 와면한다. 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른 이들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한단 말인가? 외눈박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존재임과 동시에 시야가 좁은 자, 편협한 사고를 가지게 되는 자를 표방하는 이미지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인 마냥 그대로 읊으며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본다.

우리가 그동안 무심코 받아들였던 정의, 도덕, 문화 그 모든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독서였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도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는 않은가? 좀 더 고민해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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