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장르로 쓰여진 낯선 작가의 책을 만났다.
에로틱 서스펜스라는 장르는 처음이다. 작가가 이 책을 쓰면서 만들어낸 것인지, 아니면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르인지는 모르지만 독특한 장르임은
분명하다. 몽정의 편지라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 역시 절묘한 분위기로 책의 에로틱함을, 그리고 어딘가모르게 기괴한 느낌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괜히
제목과 표지때문에 밖으로 들고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만 읽었지만 보면 볼수록 멋진 디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어떤 디자인이 이 책의
제목과 분위기를 이토록 잘 나타낼 수 있을까? 놀라운 것은 표지의 나온 날씬한 허리의 주인공이 작가 본인이라는 점. 모델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으시던데 역시나, 랄까. 부모님이 예술을 하셨던데 예술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어쨌든 논지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이만 각설하고 책의 이야기를 해보자.
나를 거쳐 슬픔의 나라로 들어가거라.
나는 영겁의 고통으로 가는 문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자들에게로 가는 문
......(중략).......
나는 영원토록 남아 있으리라.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온갖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데, 이 부분이 인상적이다.
책을 읽기 전에 보았을때도 그렇고, 책을 다 읽은 후 다시 떠올려 생각했을 때 더 그렇다. 이 문장들은 소설의 등장인물들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독자인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그야말로 영겁의 고통으로 향하는 지옥으로 빠져버리고 독자인 우리들은 이
책을 통해 지옥과도 같은 그들의 삶을 엿본다. 그로하여금 작가는 우리에게 충고한다. 이야기의 엔딩을 결코 낙관하지 말라고.
<몽정의 편지>는 거의 1년의 시간동안 집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던 형사가 집 밖으로 나오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의아했다.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보다 미래인 시점에서 시작하기에 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아리송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롤로그는 짧았고 바로 다음 장부터 나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보낸 '몽정의 편지'를 엿볼 수 있었다. 그 남자가 그 편지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은 물론 아니다. 그 편지를 읽은 다른
사람이 그것에 그 이름을 부여했지만, 아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명칭이 아닌가! 이 편지는 몽정처럼 은밀하고, 에로틱하며, 조금은
파괴적이고, 공개적으로 드러낼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과, 일방향이라는 점까지 빼닮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후에 남긴 것조차 똑같다.
몽정의 열기가 사그라든 후처럼 기묘한 습기와, 찐득한 끈적함, 그와 동시에 지독한 허무가 편지 뒤에 남았다.
p.19
당신이 숨 쉬고, 먹고, 자고, 씻고, 가끔은 남자를 끌어들여 사랑을 나누고, 지금은 이 편지를 읽고 있을 그 공간은 저와 Y가 살아
숨쉬던 공간이었습니다, 저희가 사랑을 나누던 유일한 공간이자, 살아 있음을 느끼던 유일한 공간이었다구요.
p.21
사실 Y는 섹스에, 사랑에, 삶에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진지한 여자였어요. 그러나 표현할 줄을 몰랐고 어색해하고 부끄러워했어요. 사람들은
그녀의 가슴안에 뜨거운 불씨를 몰라주고 뭐든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사람인줄 안 거예요. Y는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뒤에서는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하고서는 정작, 오디션 장에 가서는 긴장되어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배우 지망생 같았어요. 손을 어떻게 쓸
지도, 목소리를 어떻게 낼 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죠. 본인은 정작 심사위원들 앞에서 보여준 게 없으니 떨어져도 속상한 티를 못냈죠. 그래도
나처럼 편한 사람 앞에서는 그 괴로움이 터져 나왔습니다. 나는 그게 나만의 특권인 것 같고, 감투라도 쓴 마냥
뿌듯했답니다.
p.28
이럴 땐 당신이 참 밉습니다. 그녀의 냄새와 소리, 모든 것을 문신처럼 새겨둘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못된 당신은 우리가 추억할 공간을
빼앗아버렸습니다. ....(중략)..... Y와 같은 결정을 하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혹시나 그런 상황이 생길 것 같다면 본집에 들어가세요.
남은 사람들이 당신을 추억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세요. 급작스럽게 떠나더라도, 추억할 거리 몇 개쯤은 만들어두고 가라는
말입니다.
몽정의 편지라 이름붙여진 이 편지는 총 일곱번에 걸쳐 쓰여지고, 같은 횟수로 한 여자의 우편함에 넣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은 D, Y, H 이 셋이다.
편지를 쓰는 인물은 D라는 이름의 남자로, 그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Y를 그리워하며 자신과 Y의 추억이 깃든 반지하방에 새로 이사온 여자인
H에게 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에는 죽은 Y의 흔적과 그들이 함께한 추억을 지워버리는 H에 대한 원망과 Y에 대한 사랑이 녹아들어있다. 자신만
알았던 Y의 이면, Y의 고통, Y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마음까지.
그 모든 것이 편지에 깊이 배여있었다.
그리고 나는 솔직히 이 장문의 편지들을 보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어떤 점에서 그랬냐고 묻는다면, 글쎄. Y에 대한 그의 사랑? 집착?
이해? 또는 그가 구구절절 내뱉는 그들의 살아온 시간들에 대해서 였을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음습하고, 어딘가 광기가 잠들어있는 듯 느껴졌던 이 편지들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에 지독하리만치 낭만적인 편지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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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이사이에 이같은 일러스트가 몇 장 삽입되어 있다. 어지러운 선들의 조합, 그러면서도 강렬한 '이미지'가 책의 분위기와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흰부분이 있으나 빛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직 어두움만이 이곳에 남아있는 것 같다.
p.58
태어난 적도 없던 나의 진짜 욕망이 깨어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성욕이 아닙니다. 진정한 나의 삶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내 모든 것을 파괴해도 좋다고, 너를 위해서라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나 역시도 천천히 파괴되어 가고 있나 봅니다.
나 자신이 망가지더라도 한 사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겠다는게, 그리고 그것이 결국 Y와의 최종적 결말과 일치한다는 점이 묘하다.
<몽정의 편지>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나도모르게 그들의 이야기에 감명 받았고, 두번째 마주했을 때는 처음과 끝, 그 중간까지
서로 얽혀있는 이 거미줄같은 이야기가 신기해서 감탄했다.
D의 심경은 편지를 쓰면서 점점 변화한다. 처음에는 답장 같은걸 바라지 않았지만 점점 자신과 Y의 이야기를 공유하게 된 H에게 코멘트를
요구한다. 요청이 요구가 되고, 요구가 협박이 되며 이야기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달린다.
그 뒷 이야기는 생략한다.
하지만 그 파괴적인 결말, 비현실적인 그 마무리가 오히려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정말 미안해. 넌 지옥에 오면 안 돼. 앞으로 영영 다시 보지 말자."
이 문장을 읽을 때 느꼈던 짜릿하면서도 섬뜩한, 괜시리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철저하고
완벽하고 훌륭한 희생자'라는 말이 계속 뇌리에 남는다.
결국 모두 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있는, 스스로 버림받은 인물들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등장한 이들의 사랑은, 그들의 이야기는 마치 그을음을 연상시켰다.
불이나서, 검은 연기를 내며 활활 타들어가다가 마침내 연소가 끝나고 남은 그을음.
사람들은 이 그을음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거기서 맡아지는 매캐한 연기의 잔향을, 타들어간 것들의 괴로움을, 그리고 그것이 남긴 흔적을
오래도록 곱씹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