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 고블린.
이토록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있을까. 한없이 아름답고 연약한, 동화속에서 무릇 그렇듯 왕자님이 나타나 구해주어야할 것 같은 존재들인 "공주"와 흉측하고 성격이 나쁜 "고블린"의 이야기라니. 사실 책소개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한 공주가 고블린들에게 잡혀가서 왕자님이 모험과 역경을 딛고 구해주는 내용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은이 조지 맥도널드는 그런 클리셰적인 이야기 구조를 깨버렸다. 하긴, 반지의 제왕과 호빗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톨킨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유명한 루이스 캐럴 등 유명 환상소설의 작가들이 조지 맥도널드를 존경하고 있음을 숨기지 않으며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토로하는 판에, 지금 우리가 클리셰로 알고 있는 많은 부분도 결국 맥도널드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따온 경우가 많았을 확률이 높다.
어른이 동화책을 읽다니, 조금 어색한 감이 있을 수 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외로 동화속에는 대대로 칭송받아오는 여러 고전 못지 않은 교훈과 삶이 담겨있다.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아주 많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동화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주와 고블린>을 읽으면서 정말 날 즐겁게 했던 것은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밝힌 작가들의 책을 떠올리면서 '아! 이런 부분에서 영향을 받아서 그 책의 그 장면을 만들어낸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내가 사랑했던 작품의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만큼이나 들뜨는 일이었다.
그리고 책에 서두, 1장에서 <왜 나는 공주 이야기를 쓰게 되었나>를 설명하는 조지 맥도널드의 문장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작가님, 작나님은 왜 만날 공주 이야기만 쓰시나요?"
"왜냐하면 어린 소녀는 모두 다 공주거든."
"다만 공주는 자칫하면 자기 신분을 잊은 채 마치 진창에서 자라난 사람처럼 잘못 행동할 염려가 있어. 나는 어린 공주들이 도둑이나 거짓말쟁이 거지의 자식들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그래서 공주들에게는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워 줘야한단다.그래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쓸 때, 먼저 공주이야기라고 밝히기를 좋아해. 그럼 나는 공주가 지녔으면 하는 모든 아름다운 점들을 주인공인 공주에게 불어넣을 수 있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술술 잘 풀리거든."
문득 이 문장들을 보는데, <꼬마 니콜라>시리즈와 <얼굴 빨개지는 아이>의 그림작가로 널리 알려진 '장 자끄 상뻬'의 한 인터뷰가 떠올랐다. 상뻬는 행복한 어린아이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불행을, 슬픔을 모르기에 자기가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지 못하는 그런 행복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이 인터뷰가 떠오른 이유는 현실에서 모든 어린 소녀가 공주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주가 될 수 있는 소녀들이라면 맥도널드의 말처럼 '공주다운' 면모를 가져야 하기에 그가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그것을 알려준다는 점이 좋다.
무엇보다 그의 이야기에서 공주는 누군가에게 구해지는 대신, 직접 광부소년을 구하러 가기도 하고, 스스로 모험을 떠났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긴 편이라 초등학교 고학년이상부터 성인까지 읽으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책의 간간이 삽입된 제시 윌콕 스미스의 동화 삽화는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마땅할 작품으로도 보이는데, 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그의 그림을 보는 것도 즐거움 중 하나였다.
표지에 그림을 내부에 있는 삽화 중 하나로 대체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