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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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는 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기상천외한 일도, 멀게 존재하는 신화같은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기적을 경험한다. 어쩌면 진부한 이야기겠지만, 우리의 첫번째 기적은 탄생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자라는 것, 배변을 가리고 걸음마를 하고 성장하여 다른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그 모든 것이 기적이다. 평범하고 무난한 삶을 잃어 이탈한 삶의 궤도에서 절망을 맛본 사람만이 그것이 얼마나 기적같은 일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리지 않고도 우리가 기적을 경험하는 시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다. 왜? 혹자는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는 우리가 변화하는 시기라는 점에서 놀라운 시기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시기에 우리는 너무나 작은 동기, 작은 영향들로 인해 어제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신체가 새로운 성숙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처음으로 어리숙한 풋사랑을 시작하고, 우리를 둘러싼 주변 환경에 대해 스스로의 시각으로 정의를 내리게 되는 시간들. 우리는 체념하고, 때론 타협하고 아픔을 겪고 사랑을 하며 자아를 확립한다. 그 시절에 만들어진 가치관이 우리의 절반, 그 이상을 완성한다. 하지만 언제나 우리가 삶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성장하지는 않는다. 때로 우리는 실패하고,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몰고 가기도한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나지만 그렇기에 더 아픈 글자로 새겨지는 흔들리는 시간들. 그 시간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번민한다. 사소해보였던 작은 선택이 나비효과를 일으켜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 개인의 내면에 있어서 그 시기는 기적과도 같은 시간이다.
이 책의 주인공 줄리아 또한 이제 막 사춘기를 겪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결코 변할거라 예상하지 못했던 주변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마주한다. 줄리아는 자신의 내·외면적 변화 뿐만 아니라 살아온 환경마저 뒤틀리는 이변을 겪는다.
p.11
우리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느낄 수가 없었다.
매끈한 피부 밑에서 자라나는 종양처럼, 일상적인 하루의 끄트머리에서 조금씩 볼록하게 솟아오르는 별도의 시간을 처음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 무렵 우리의 관심사는 날씨와 전쟁이었다. 지구의 자전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먼 나라의 도시에서 쉴 새 없이 폭탄이 터졌다. 허리케인이 몰려왔다가 물러났다. 여름이 끝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평소처럼 흘렀다. 초가 모여서 분이 되었다. 분이 모여서 시간을 이루었다. 그 시간들이 모여서 언제나 일정한 길이의 하루가 만들어지는 걸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p.13
슈퍼마켓의 물건들은 금세 동이 났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발라먹은 닭 뼈처럼 모든 진열대가 깨끗했다. 고속도로는 이내 꽉 막혔다.....(중략)....갑작스레 불빛에 노출된 작은 동물처럼 그들은 이리저리 허둥거렸다.
물론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구는 연료가 떨어져가는 기차처럼 서서히 그 속도를 늦춘다. 이것이 '슬로잉'이라 불리는 현상의 시작이다. 원인을 알 수 없는 그 하나의 현상은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에 크고 작은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그 변화들을 미처 체감하기도 전부터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비상식량을 사재기하고 단출한 짐을 싸서 위험을 벗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지구전체가 처한 위기에 도망갈 곳은 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채 속수무책이다. 재밌는 것은 이 소설에서 재난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그 예로, 실제로 2000년대로 접어들기 전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으로 인해 벌어졌던 종말 헤프닝들과 닮아있다.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또 누군가는 애써 평온을 유지하며, 수많은 종교단체들이 각기 다른 태도로 종말을 연상시키는 이 현상을 받아들인다.
p.49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최초의 며칠은 인간이 느끼는 불안이 예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했던 날들이었다. 오존층의 구멍, 녹아내리는 빙하,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와 돼지 인플루엔자, 점점 흉포해지는 꿀벌 등의 예를 보면, 우리의 불안은 결국 적중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진짜 재앙은 늘 예상을 빗나간다. 그것은 상상한 적도 없고 그에 맞서 준비할 수도 없는 미지의 이변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만일의 사고를, 최악의 재난을 상상한다. 그것은 무료하고 정적인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탓일수도 있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급격하게 이전과 달라지고있는 환경(꿀벌의 실종, 녹아내리는 빙하등)으로 발현이 예상되는 재앙에 대처하기 위한 보호기작일 수도 있다. 인류는 (지구전체의 역사로 보자면) 짧은 시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때로 자만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다가, 마침내 인간이 결코 맞설 수 없는 재앙앞에 무너져내린다. 과연 슬로잉현상을 예상했더라도, 그것을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p.81
무심결에 내 입에서 기도의 말이 흘러나왔다. 제발, 제발, 아무일 없게 해주세요.
그날 우리는 고대 사람들처럼 하늘의 거대한 힘을 두려워했다.
지구의 자전 속도가 일정한 규칙없이 느려지면서 사람들은 그동안 하늘과 천체의 움직임에 대해 너무나 쉽게 예상했던 것들을 더이상 예상할 수 없게 됬음을 깨닫는다. 그 중 하나가 일식이다. 우리는 몇년에 한번 일어나는 일식, 개기일식이 언제 어느지방에서 몇시경에 관측될지 예측한다. 하지만 달라진 지구의 자전 속도 탓에 지구는 마땅히 오리라고 예측되었던 위치에 오지 않는다. 때문에 느닷없이 일식을 마주친 사람들은 그것이 일식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몇 분간 지속된 어둠속에서 지구의 종말을 예감하며 두려움에 떤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고대라고 부르는 시절에 사람들은 자연을 신으로 모셨다. 우스운 것은 우리가 어떤 것이 무엇인지 알 때와 알지 못할 때, 동일한 대상에 대해 부여하는 의미가 천지차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달이 지구의 위성이라는 걸 알 때는 그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실제로 태양과 달은, 그리고 지구 자전은 언제나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지만(조수, 계절의 변화 등) 낮과 밤의 변화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며 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스스로 자만에 빠지고 자신들이 모르는, 비정상적인 것에 대해 병적인 불안을 내비친다. 그 속에서 익숙한 것은 순식간에 낯설은 것이 된다,
p.121
아는 것이라고는 곧 태양의 움직임에서 벗어난 생활이 시작될 것이라는 점, 빛은 '낮'에서 벗어났고 어둠은 '밤'에서 풀려났다는 점뿐이었다.
하루의 시간이 점점 늘어나자 정부는 '클락타임'을 도입한다. '클락타임'은 실제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와 관계없이 그동안의 24시간 체제를 유지하는 제도다. 처음에는 시간이 얼추 맞았지만 점점 시계와 태양의 시간은 어긋나고 한편에서는 클락타임에 반대하는 '리얼타임' 지지자들이 빛의 시간에 의존하는 생활을 고수한다. 대다수의 클락타임 생활자들에게 소수의 리얼타임 지지자들은 처음에는 그 느긋해보이는 삶에 부러움의 대상으로, 그리고 점점 사회의 체제를 따라가지 않는 괴짜들로 비춰진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다수와 다른 소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그렇듯 무시받고, 차별받고, 경멸당하며 쫒겨난다. 사람들은 슬로잉현상이라는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스스로의 생활방식을 어쩔 수 없이 바꾸면서도 '변화'를 싫어한다. 그들은 안정과 평안을 바라고 겉으로나마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그 가면과도 같은 생활에 불협화음을 내는 사람은 당연히 거부된다. 결국 리얼타임 지지자들은 그들끼리 모여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땅에 자신들의 거주지를 만든다.
p.136
"이제 자려무나. 캄캄할 때 일어나 등교하려면 힘들 텐데."
아빠는 한동안 내 침대 발치에 앉아 창문 너머로 빛나는 푸른하늘을 쳐다보다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놀라운 시대야. 우리는 경이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해는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저물었다.
p.138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이 나라에서 매년 삼백육십오 일 치의 일출과 일몰 시간을 그 외의 정보와 함게 명기한 두툼한 연감이 발행되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믿기지 않는다. 우리가 하루하루의 명확한 리듬을 잃었을 때, 세상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공통 인식까지 잃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일들, 그러니까, 아침에는 해가 뜨고 밤에는 해가 지는, 그런 일련의 일들은 슬로잉 현상을 겪으면서 한때 그런일이 있었다는 사실마저 믿을 수 없이 놀라운 일이 된다. 일상은 비일상이되고 비정상은 정상이 된다.
p.147
그 시기를 회상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 하나는 우리가 정말 빠르게 적응했다는 사실이다. 한때 익숙했던 것이 점점 낯설어졌다. 우리의 해가 정해진 시간에 뜨고 졌다는 사실이 놀랍게 생각되었다. 내가 한때 외로움도 수줍음도 덜 타는 행복한 소녀였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p.154
우리 모두 나비들이 퍼덕거리며 날아올라 하늘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론 우리는 나비들이 모르는 것을 알았다. 그것들의 삶이 얼마나 짧고 고통스러운지를.
재밌다.
나비의 삶이 고통스러운 걸 아는 것은 '우리 모두' 고통스러운 삶이 무엇인지, 알고 있거나 그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고통. 삶은 때로 아름다워보이지만 그 이면에 얼마나 괴로운 일들로 가득차있는지 아직 모르던 천진한 아이들이 점차 그것을 배우고 있다는 의미이다. 줄리아를 포함한 아이들은 물론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알지 못했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다른 누군가는 알고있었다. 우리 인간들의 삶이 얼마나 짧고 고통스러운지를.
p.168
"너도 옛날에는 훨씬 용감했는데."
아빠가 시동을 걸며 말했다.
"정말 그랬지. 그런데 이젠 엄마처럼 나약해졌어."
아빠의 말이 옳았다. 나는 크고 작은 재난에 늘 신경을 곤두세우는 걱정 많은 소녀로 성장했고, 실망스럽게도 내 눈에는 우리주변의 감추어진 모든 것들이 잘 보였다.
사람들은 슬로잉현상 탓에 조금씩 충동적이 된다. 아니, 어쩌면 늘 갑자기 우리에게 불쑥 찾아오곤 하는 충동에게 슬로잉 현상때문이라는 명분을 세워줬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줄리아를 데리고 해안가의 집으로 향한다. 거기에는 줄리아의 엄마와 결혼하기 전 과거 연인의 집이있다. 그 집에서 아빠는 줄리아에게 과거 그 집에서 있었던 크리스마스 파티, 그 추억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줄리아는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밀물에 불안을 느낀다. 빨리 나가자고 재촉하는 줄리아에게 아빠는 그녀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줄리아는 다른 것 때문에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줄리아는 이미 아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있었고 아빠가 그녀와 엄마를 떠날까봐, 그래서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가 된 집에 와 추억을 늘어놓는 것처럼 엄마와 자신이 없는 삶속에서 우리에 대한 추억을 회상하며 과거로 흘려보내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을 느꼈던 게 아닐까. 이 장면은 줄리아의 이런 미묘한 심리와 줄리아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어떤 측면으로든 이전과 달라졌고, 달라지고 있다는 걸 나타낸다. 인간도, 시대도, 고정된 존재가 아니다. 그 모든것은 언제나 서서히 변화하고있다.
p.173
"세상은 변해. 하지만 변하면 안 되는 것도 있어."
엄마가 말했다.
변하면 안 되는 것은 있다. 하지만 안 되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은 다르다. 변하면 안 되는 것이 반드시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줄리아 가족의 관계에 있어서 계속 복선처럼 떠올랐다.
p.196
할아버지는 팔십육 년 생애 가운데 이 년을 알래스카에서 지냈는데, 금광에서 일하다가 나중에는 여러 어선을 타고 다니며 일했다. 하지만 그 이 년은 할아버지의 기억 속에 스펀지처럼 확대되어 나머지 기간을 압도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누군가에게 들려줄 변변한 일화 하나 없이 수십 년이 흘렀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그것은 실제로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는지와는 별개로, 그때 그에게 어떤 의미있는 사건들이 있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체감된다. 할아버지가 알래스카에서 보낸 몇 년이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수십년을 압도했던 것처럼. 줄리아가 세스 모레노와 보냈던 그 짧은 시간은 그 이후의 시간을 압도할 것이다. 슬로잉 현상은 상대적 시간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어쨌거나 슬로잉 현상은 계속 지속되고, 일단 그것에 적응하면 그것은 더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적 시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들은 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너무나 짧게 느껴지는 행복한 시간들 뿐이다.
p.237나는 아직도 브래드버리의 단편이 어떻게 끝을 맺었는지 기억한다. 마침내 칠 년이 지나 금성에서 해가 빛나는 날이 오자, 한 남자아이가 다른 아이들을 부추겨 꼬마 여자아이를 옷장에 가둔다. 해가 뜰 때 다른 아이들은 우르르 밖으로 나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얼굴에 내리쬐는 햇볕을 느낀다. 해가 비치는 시간은 한 시간 뿐이다. 꼬마 여자애는 계속 옷장에 갇혀 있다. 누군가가 옷장에 갇힌 꼬마 아이를 기억해 냈을 무렵 칠 년 후에 나타날 해는 다시 구름 뒤로 숨어 버린다.
줄리아가 학교 숙제로 읽었던 책에 대한 짧은 회상. 브래드버리의 단편에 대한 이 짧은 문단이 나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에 나는 이 이야기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정확한 제목을 모르기 때문에 완벽한 정보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한국 정발본에 수록된 단편은 아닌듯 하다. 태어나서 단 한번도 햇볕이라는 걸 보지 못하다가 7년에 한번, 단 한시간만 그것을 보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이 책에서 슬로잉현상이 심화된 후에 줄리아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전율과도 같은 감동, 그 이상의 의미이지 않을까.
p.273"자기장 때문에 고래들이 해변으로 밀려오는 거라고. 고래는 자기장을 이용해 길을 찾거든. 그런데 슬로잉 때문에 자기장에 이상이 생긴거야."...(중략)...."고래만 자기장이 필요한 게 아니야.""우리 인간에게도 필요해."
자기장에 이상이 생기면서 고래들만 죽어나가는게 아니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큰 고래들의 떼죽음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을 뿐이다. 작게는 몇몇 곤충, 몇몇 동물들이 제 집을 찾아가지 못할 것이고 인간들이 그동안 사용하던 나침반이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슬로잉현상이 심화되면서 몇몇 사람들은 '슬로잉 증후군'이라 불리는 병을 앓는다. 그것은 실제로 두통이나 메스꺼움을 일으키고 심한 경우 완전히 기력을 잃고 죽어가게 만들지만 본질은 병든 마음에서 비롯된다. 세스에게도 고래에게처럼 길을 찾기 위한 자기장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오랜 병치레 끝에 엄마가 죽고, 일이 바빠 집에는 거의 있지 않은 아빠 사이에서 그는 슬로잉 현상을 맞이한다. 그에게 특별한 친구가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가 줄리아와 보낸 시간은 어떻게보면 너무나 짧다. 세스는 외로운 아이었다. 그가 매일 방과후에 혼자 남은 빈 집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지는 책에서 기술되지 않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결국, 세스는 슬로잉 증후군에 걸려버린다. 애써 살리려했던 고래가 이미 죽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됬을 때, 세스는 마침내 무너져내린다. 그의 예민한 감성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세스를 좋아하는 줄리아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라서일까. 나는 어느덧 이 키 큰 꼬마를 사랑하고 있었다.
p.301"이곳에 있는 우리가 몽상가처럼 보이겠지.""하지만 사실은 정반대야.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지 않아.""우리는 현실주의자야. 몽상가는 너 같은 애들이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또, 서로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던 부분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한때 같은 무리에 속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다른 사람을 자신과 다른 인격체로 분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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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60
"패러독스란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두 가지가 모두 진실인 경우를 뜻해."
아빠는 그렇게 말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말을 잊지마, 알았지? 인생에는 흑백으로 나뉘지 않는 것도 있어."
사실 이 부분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다.
패러독스.
인간은 모순적이다. 그래서 양 손에 서로 다른 것을 쥐고 둘 모두를 사랑하는 일도 가능하다.
마지막 아빠의 말에는 이 소설의 내용과 그것을 넘어서는 수많은 의미가 담겨져있다. 천천히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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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끝 부분에서, 지구는 여전히 매 시간 조금씩 더 느려진다. 일주일 이상의 낮과 일주일 이상의 밤의 시간이 교차한다. 방사선의 위험으로 사람들은 밖이 어두워져야만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집집마다 차양막이 드리워지고 많은 수의 동식물이 지구상에서 역사를 마감했으며 인간들은 어쩌면 점점 다가오는 그들의 끝을 기억하기 위해 머나먼 우주로 우리가 한때 이곳에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많은 기록들을 쏘아보낸다. 줄리아는 그 뉴스를 보며 오래전 세스와 함께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위에 적었던 글귀를 추억한다. '우리가 여기에 있었다' 무엇을 적든 아주 오래 남을거라고 했던 세스의 말처럼 그 기록은아주 오랫동안 아스팔트위에,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줄리아의 마음속에 남게될 것이다.
소설은 그 이후 그들의 마지막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이대로가면 지구가 언젠가는 멈출거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게 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 수 없는 원인으로 느려졌던 자전은 어느날 또 갑자기 속도를 빨리해 이전과 같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갈수도 있고, 아니면 서서히 속도를 늦추다가 마침내는 멈추고, 그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속도를 높혀 자전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든 지구 생명체가, 환경이, 사람들이 그 변화에 쉽게 적응하기는 힘들것이다. 그것이 배출하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모든 변화에는 성장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져 죽어간 수많은 새들, 자기장의 영향으로 해안가로 몰려와 떼죽음 당한 고래들, 슬로잉의 초반 벌어졌던 클락타임과 리얼타임 지지자들의 대립 등을 대변한다. 결국 이야기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진짜 재난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그 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 있다.
사춘기와 슬로잉 현상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같다. 하지만 사춘기는 성장하기 위한 발판이라는 점에서 서서히 '멈추는' 슬로잉 현상과 대조된다. 이 책을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 서로 다른 닮은꼴들을 어떤 이야기로 풀어나갔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사춘기의 결과가 그렇듯 이 이야기 속에서 슬로잉 현상을 겪는 사회가 맞이할 결과 역시 '겪어보기 전에는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소설의 끝 부분까지는) 인간은 결국 어느정도의 상처와 아픔을 겪었지만 그 바뀐 삶에 적응함으로서 한 단계 성장했다. 혹자는 인류가 이 슬로잉현상 탓에 퇴보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진보와 퇴보는 종이 한 장 차이고 어찌되었건 인간들은 또다시 살아남았다. 적어도 살아있다면 희망은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많은 철학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에 비하면 매우 읽기 쉬운 문체로 되어있다는 점이 놀랍다. 그저 이 책을 시간떼우기 용으로 읽는다면 심심풀이용 책이 될 것이고, 그 내면에 있는 하나하나의 단서를 찾아가며 읽는다면 사유를 위한 책이 될 것이다.
문득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사춘기를 겪던 시절 이 책을 읽었더라면 어떤 감상을 말했을지 궁금해진다.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들, 이렇다할 사춘기 없이 그 시절을 보내고 어른아이가 되어 뒤늦게 번민하는 시기를 보내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통찰력을 발휘한다면 당신이 찾아헤매던 것을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삶 속에서 약간의 성장통과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