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몰이를 하는 책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추측하여 관심이 가는 것은 사실이고, 나도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은 충동이 있다. 작년부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 이제야 읽으며 발행 연도 때문에 깜짝 놀랐다. 1965년도에 출판된 책이 이제야 대중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중간에 이유를 찾아보곤 했다. 사실 영문과 교수였던 분이라 문학적인 표현을 많이 기대했는데 앞부분은 다소 지루했다. 아름다운 배경 묘사나 마음을 꿰뚫는 심리적 표현 없이 무미건조하게 전개되는 주인공의 삶은 흥미롭지 않았다. 감정의 널뛰기를 하는 나와는 대조되는 그의 삶은 이름만큼 단조롭고 묵직했다.
Stone이 주는 느낌은 무엇인가? 발에 걸리는 돌은 어디든 굴러간다. 작게 혹은 크게 차이든, 내던져지는 대로 그 자리에 머무르고, 어떤 건축물에 사용되든 그 자리에 꼭 알맞게 부합되어 조화를 이룬다. 가볍지 않고 진중하며 어떤 상황에도 분노하지 않는다. 진흙과 섞여도 묵묵히 받아들이며 금세 적응하여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빛나지 않으며 튀지 않고 눈에 띄지 않으나 맡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않고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눈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존재 가치는 기억에서 잊힐 것이다. 석화된 인간과 유사한 스토너를 읽으며 화가 나기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잘 적응하는 그는 행복한 삶이었을까?
무엇이 스토너를 스토너답게 만들어 주는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생계 유지가 전부였던 부모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대학 졸업 후에도 당연히 농업을 이어갈 것이라 생각했으나, 셰익스피어 소네트 73번을 읽으며 문학적 감수성이 폭발하고 교수의 추천을 받아 영문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유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 그것 말고 그 무엇이 필요한가? (˝It’s love. You are in love. It’s as simple as that.˝ p. 20).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이,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좋다는 문구가 생각이 난다.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는 우선순위가 사랑이길 바란다. 스토너는 자신이 사랑했던 문학 교수가 되었다.
문학에 대한 사랑을 간파하고 이끌어 준 교수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학생 안에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어 발굴하는 것 또한 교사의 역할이 아니던가? 스토너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읽어내어 영문학 전공을 추천한 Sloane 교수가 없었더라면 스토너는 농부가 되어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인도와 조언으로 인해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방향을 선택하게 되고 그것이 직업이 되었다. 그의 삶에 또 다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아내 Edith였다. 그들은 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왜 불행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몹시 궁금하다. Edith의 성격은 어떤 성장 과정을 거쳤기에 그렇게 특이한 양상을 보였는지, 그녀의 입장이 되어 보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그 사람의 피부 속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를 이해할 수 없다는 문구를 떠올린다.
스토너의 노력은 정말 눈물겹다. 애정 없는 아내와의 관계, 갑자기 아이를 원하는 아내의 요구, 퇴근 후 채점하고 수업 준비하며 딸 돌봄, 딸과 서재에서 함께 책 읽으며 유지했던 평온한 관계, 아내의 딸에 대한 집착으로 딸과 소원해진 거리 등을 거부감 없이 잘 받아들인다. 누가 보아도 정상적인 관계는 아니나 프로처럼 잘 적응하는 모습에 놀랄 뿐이다. 개인적으로 스토아학파 관련 책을 읽고 나도 그렇게 환경에 상관없이 인내하고 적응하고 싶었다. 스토너에게 잘 어울리는 단어가 stoical이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그는 화석화된 인간이 아니고 살아 숨 쉬는 감정의 동물임을 읽을 수가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으로 모든 것을 쉽게 단정 지음은 매우 위험하다.
Lomax와의 일로 인해 가르침에 대한 열정도 상실하고 마치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다. 결국 모든 것은 덧없고 허무하며 무(無)에 수렴한다고 생각하던 시절에 Katherine Driscoll을 만나 급속도로 사랑에 빠지게 된다. 나는 이 대목에서 오히려 그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일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린 그에게 캐서린은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존재였다. 살아 있으되 죽은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그에게 그녀는 ‘처음 사랑이 마지막 사랑이 아님‘을, ‘사랑은 끝이 아니라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가르쳐 주었다. 캐서린 또한 사랑에 빠지게 되면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고 했다. (˝It takes being in love to know something about yourself.˝)
서로의 관계를 given opinion으로 부르며 사랑과 배움이 하나의 과정인 듯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지적인 탐구도 잘 이어갔으나, 결국 스토너는 캐서린을 잃고 다시 폐인이 된다. 사랑에 대한 상실과 가르침에 대한 열정을 반복하며 40년간의 가르침을 이어갔다. 은퇴를 완강히 거부하던 그에게 찾아온 질병으로 마침내 가르침을 내려놓게 된다. 스토아 철학적 인내의 삶(stoical endurance)을 살아낸 그는 어디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을까? 대학 시절 이래로 늘 책과 함께했고 책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책의 가치가 크지 않다고 생각했고 책에서 자신을 찾을 것이라는 허상은 없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작은 일부가 책에 있었고, 앞으로도 책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스토너는 문학을 사랑했고 가르침을 좋아했다. 딸을 돌보며 채점을 하고 수업 준비를 했던 내용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의무감을 넘어 애정이 있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비난받는 캐서린과의 사랑은 죽어 있던 그의 영혼을 살렸고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이성과 논리로만 판단하기에는 사랑과 사람의 관계는 너무나 복잡하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열정적인 삶이 무엇이고 열정을 바쳐 사는 것이 과연 훌륭한 삶이라 말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스토너가 일상과 환경의 변화에 일희일비하며 감정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면 부적응자가 되었으리라.
왜 21세기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스토너를 읽는가? 감정 노동에 지치고 상처받아 차라리 스토너의 삶을 부러워해서일까? 내게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그의 삶을 선택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상황에 저항하지 않고 잘 순응하며 책과 가르침에서 위안을 얻고 거기서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 그의 삶이 약간 탐나는 것은 사실이다. 문학에 대한 사랑은 한없이 부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