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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0426님의 서재
  • The Sickness Unto Death : A Ch...
  • Anti-Climacus
  • 17,920원 (20%900)
  • 1989-03-30
  • : 22
책을 읽는 궁극적 목표는 심리학 혹은 철학 원서 속에서 위안과 평안을 찾고 싶었다. 잠들지 않는 내적 불안감과 허무감을 철학서로 위로받으려 했다. 한글 번역서와 원서에는 큰 간극이 있고 영어가 부족하지만, 한글로 읽을 때보다는 영어로 읽는 것이 이해 체감도가 높았다. 마침내, 부족한 내가 키에르케고르의 원서를 도전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지만, 절반 정도 이해한 것 같은 아쉬움이 있다.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력의 한계, 신학적 배경 지식, 신앙의 농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답답했던 갈증과 목마름에 시원한 해갈을 제시한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 무엇일까? 질병이라 함은 신체의 질병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의학 발전에도 여전히 불치병으로 존재하는 암을 먼저 떠올리지만, 이 책의 질병은 신체의 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실존적, 영적인 질병으로서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질병인 despair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despair가 전체 책을 통해 관통하기에 읽기만 해도 내 마음이 우울해지는 것 같다. 죽음(Death)이란 단어 앞에서 누구나 작아지고 소심해질 수밖에 없지만, 헤아릴 수 없는 신체의 고통으로 시달리는 사람에게는 죽음이 해방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육체의 죽음으로 고통이 끝나지 않는 질병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청년의 때에는 암울한 미래를 놓고 절망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지울 수 없는 과거에 대해 절망한다. 자신의 영혼을 세상에 저당 잡힌 채, 유능함, 부와 명예의 축적 등을 향해 달려가며,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만 집착하는 세상인(immediate person)으로 살아가다가 우리의 시선을 내적인 방향(inward direction)으로 돌릴 때가 있다. ‘나의 삶은 이대로 좋은가?’ 세속적인 것, 일시적인 것, 유한한 것에 절망하고, 영원한 것을 찾는 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서 또다시 절망을 한다. 이렇게 인간은 육적인 것으로만 만족할 수 없도록 지어졌다. 인간은 합성물이다(A human being is a synthesis.)라는 표현이 있다. 무한/유한, 영원한/일시적, 자유/필연이 합쳐진 존재이다. (infinite/finite, eternal/temporal, freedom/necessity)

그런데, 무한함과 영원함을 거부하며 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절망할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인 기본값을 거부하며 혼자 힘으로 살아감은 마치 ‘나라가 없는 왕(a king without a country)’으로 살아감과 같다. 원래 왕은 따로 있는데 그를 인정하지 않으며 내가 왕이 되어 살려고 하는 것이 모순이고 반항이며 범죄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 외에 그 누구도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에 절망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왕이라 스스로 생각하지만, 강함이 아닌 약함(weakness)에, 적극적인 세력을 펼치지 못하는 수동성(self-passivity)에 절망하는 인간이 바로 과거의 나였다. 정말 치열하게 게으르지 않게 살았으나, 미래가 항상 밝은 것이 아니기에 멈출 수가 없었고, 더 열심히 살면 밝은 미래를 손에 얻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는 불행한 과거를 망각으로(forgetting) 달래며 원래의 나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절망은 늘 현재형이었고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죄(sin)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소크라테스 이론(Socratic doctrine)과 기독교적 이론(Christian doctrine)에 대한 비교가 있었다. 옳은 것을 알면서 행하지 못함은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이며 무지를 깨우치라고 주장했던 소크라테스의 이론은 정확치가 않다. 무지해서 옳은 일을 행하지 못함이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행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반항이 인간에게 있으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만 보아도 딸로서, 친한 친구로서, 지인으로서, 공직에 있으면서 어떤 일을 어떻게 행함이 좋은지 알지만, 행하지 못한 것이 얼마나 많으며, 양심이 시키는 데도 고집을 피우며 망설인 적이 얼마나 많은가? 내 안의 죄성이 있어서 양심의 소리에도 모르는 척하며 눈감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죄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처럼 무지(ignorance)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 이행하지 않는 의지(will)와 그 의지의 부패(corruption)에 있다.

왕과 일일 노동자의 비유가 있었다. 어느 날 왕이 일일 노동자에게 찾아와 사위가 되는 특권을 주었다고 하자. 그러나 일일 노동자는 자신이 왕의 딸과 결혼할 능력이나 위치가 안 되는 걸 알기에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조롱하며 이를 거부하고 있다. 이 또한 죄(sin)이다. 왕이 되신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시어 아무것도 아닌 인간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특권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는데, 이것을 믿으려 하지도 않고 오히려 조롱하며 온몸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이것이 죄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왕은 강제로 일일 노동자에게 왕임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로(totally incognito) 일일 노동자에게조차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고 자유 의지를 주시며 인간의 의지(will)를 테스트 하심과 같다.

인간의 죄성이 얼마나 큰지를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와 비유한다. 심리학적 교묘한 수단(psychological master-stroke)은 죄의 계속성과 강화를 의미한다. 맥베스가 왕을 살해하고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리지만, 이미 악을 행했으므로 폭군이 되는 더 악한 일을 함으로써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며 죄를 유지하려고 한다. 결국 그는 절망을 덮으려고 죄를 강화시킴으로써 절망을 벗어날 수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이 인간의 목표이자 기준이 되어야 하거늘 인간 스스로 절망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절망을 키우는 일이 된다. 모든 인간은 죽을 운명이고 죽은 후에는 심판이 기다린다. 개인 각자가 잠시 다니러 온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일들이 낱낱이 밝혀지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죄성 이전 단계에 3가지의 offense 단계가 있다. 첫째, 가장 낮은 단계의 거부감/죄(offense)는 중립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결정하지 않고 유보하는 단계이다. 나를 태어나게 하시고 인간으로 살게 하신 하나님을 인정도 거부도 안 하는 것이다. 둘째,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형태로 예수님을 인정하지만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마지막은 긍정적인 거부로 기독교적 관점을 모두 비진리 및 거짓말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현재 내 주변에도 위 3가지 단계의 지인들과 가족이 있다. 나 역시 오랜 기간, 두 번째 단계로 살아왔기에 지인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지만, 다시 이 책을 읽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신을 떠난 인간은 모두 절망이라는 질병을 만날 수밖에 없고 회개하지 않은 모든 죄는 새로운 죄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나를 아는 모든 지인들이 나라가 없는 왕으로 살려는 태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진정한 왕으로 모시며 왕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한다. 헤아릴 수 없는 높고, 깊고, 넓은 사랑으로 날마다 죄를 범하는 죄인인 인간에게 공평한 사랑을 베푸시며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참아주시는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온몸으로 깨닫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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