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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s0426님의 서재
  • A Tale of Two Cities (Paperbac...
  • 찰스 디킨스
  • 8,640원 (20%440)
  • 2003-01-30
  • : 1,233
추석 연휴를 학수고대했던 이유는 2권의 책을 끝내겠다는 원대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연휴 시작 직전에 책의 Introduction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 위대한 Charles Dickens가 아닌가? 그간 읽었던 그의 모든 책은 나를 잠 못 들게 했던 page turner였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게 하는 그의 작품은, 밤을 지새며 읽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명불허전이었다. 사실 약간 걱정이 되었던 것은, 누군가의 리뷰에서 A Tale of Two Cities를 읽으면 실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어서 지금까지 미뤄두었다는 점이다. 눈물 범벅으로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글 독자들의 리뷰를 다시 보니 그 우려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영어가 너무나 어려웠기 때문이다. 1859년도에 출판된 고전으로, 수사학적 기교가 넘쳐나는 만연체 문장이 많았다. 대화체를 제외하면, 배경과 상황 묘사는 탁월한 은유와 직유를 사용해 긴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Mr Cruncher의 비문법적 문장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이렇게 은유와 비교가 넘치는 함축적 긴 문장을 제대로 번역하는 일은 정말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많은 한글 독자 리뷰가 번역의 한계를 지적했다. 작가 본연의 의도를 살리면서 문학적으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모든 부분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위대한 작가의 탁월한 문체에 감탄하고, 부족한 나의 지식의 한계를 느끼며, 연애 소설에 포장된 역사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으며 읽었다. 처음 진입 장벽은 높았지만, 중간에 포기했더라면 장엄하고 숭고한 뒷부분의 감동을 놓치는 큰 실수를 했을 것이다.

거의 마지막 직전까지 Charles Darnay와 Lucie Manette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며 읽었다. 18년 동안 억울하게 바스티유 감옥에 있었던 아버지(내과 의사)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Lucie는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여성이다. 프랑스 귀족이었던 신분을 스스로 버리고 영국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는 Charles는 도덕과 양심의 대명사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청년이다. 평온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던 중, 부하가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듣고 목숨을 걸고 프랑스에 들어가 1년 이상 갇혀 있었던 정의의 사도이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고, 다른 누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미를 장식한 인물은 Sydney Carton이었다. 자기 파괴적 삶을 살며 자존감도 낮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했던 그가 Lucie Manette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그러나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Lucie는 Carton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격려를 건네며,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일러주고, 평생 이 고백을 비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녀의 선량함과 따뜻함이 만들어낸, 엄청난 영향력의 순간이다. 이로 인해 Sydney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자신을 희생하리라고 다짐한다. 이 부분이 Chapter 13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혀진 Sydney는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타나, 감옥에서 교수형을 기다리던 Charles 대신 옷을 바꿔 입고, Charles를 내보낸 뒤 자신이 대신 죽음을 맞이한다.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는 생소하지 않지만, 막상 책으로 읽으니 엄청난 감동이 밀려왔다. 마지막 장은 그 어떤 책보다 감동적이었다. Sydney는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했을 뿐 아니라, 옆에서 같이 죽어야 했던 소녀의 손을 잡아 위안이 되어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 편안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아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Sydney는,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숭고함을 발산했다. 그의 마지막 문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It is a far, far better thing that I do, than I have ever done. 그가 죽음으로 누군가를 살린 행위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온 모든 행위보다 의미 있고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무엇이 그를 변화시켰는가? 현실에서 과연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Lucie를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그는 기꺼이 목숨을 버리고 평온하게 삶을 맞이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남편, 아이, 아버지 모두를 살릴 수 있다는 기쁨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사랑이 이렇게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을까? 나 역시 어디서든 주인공으로 살고, 센터에서 조명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나 Sydney는 처음에는 비중이 적고, 주인공을 빛나게 하는 조연 정도라 생각했지만, 결국 내 눈물을 쏟게 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주인공의 목숨을 살린 조연이 아니라, 혁명의 의미, 사랑의 가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진정한 주인공이었다.

Sydney가 암기했던 성경 구절은 마지막 부분에 세 번 정도 반복된다.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will live, even though he dies.” (John 11:25) 결국 진정한 부활은 혁명을 통해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작가가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와 복수를 부르는 프랑스 대혁명의 민낯이 연애 소설의 포장 속에 담겨 있었다. 평민 여자들이 차라리 불임이 되어 비참한 평민들이 죽기를 기도한다는 평민 청년의 말은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귀족들의 고귀한 잠을 위해 평민은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배고픔, 헐벗음, 가난, 고통, 목마름 외에 가진 것이 없었던 그림자 같은 삶을 살던 평민들에게 혁명만이 살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치던 프랑스 대혁명(1789)의 실체는 The Reign of Terror(공포 정치: 1792~1793)로 이어져, 많은 사람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52명이 처형되기로 예정된 단두대가 놓인 장소는 마치 대중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공원(a garden of public diversion)처럼 묘사되었고, 여성들은 바쁘게 뜨개질하며 현재 몇 명이 죽었는지 숫자를 세고 있다. Sydney의 손을 잡고 억울하게 죽었던 소녀는, 공화국이 정말로 평민에게 선한 행위를 한다면 배고픔과 고통이 줄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혁명이 아니고서는 바꿀 수 없는 뿌리 깊은 체제와 관습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야 하는가? 악을 악으로 이길 수 없음을 프랑스 대혁명이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악을 선으로 이길 능력조차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전 귀족들의 횡포, 평민들의 불행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대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을 표방한 공포 정치 또한 무섭고 섬뜩하다. 이어지는 우울함 이면에는 Sydney의 희생이 주는 감동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한 사람의 따뜻함과 진정성으로 변모된 삶, 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삶,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는 삶. 그는 이런 행위가 평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다고 고백했다. 숭고함을 넘어 장엄하다. 다시 나는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난다. 어떻게 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돌아보게 하는, 감동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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