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20대에 유토피아 사회주의와 이성주의를 신봉하는 무신론자이며 급진적 개혁가로 활동하다가 시베리아에 정치범으로 4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감옥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책은 신약(The New Testament)이었고, 신약을 읽음으로써 교만했던 지식인이 심오한 크리스천 사상가로 변화되었다.
이 책의 스토리는 허구이지만, 주인공 Raskolnikov는 젊은 시절의 도스토예브스키이며, 주인공의 심리적, 도덕적, 사회적 요소는 작가의 삶 및 경험과 닮아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자서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와 더불어 양대 산맥으로 러시아가 자랑하는 위대한 소설가의 고전은 말 그대로 명불허전이었다.
주인공은 19세기 St. Petersburg에 만연했던 가난, 범죄, 사회적 부패를 척결한 자격이 있는 특별한 사람이라 믿었다. 사람을 ordinary vs. extraordinary로 나눈다면 그는 대의명분을 위해 쓸모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죽일 자격이 되는 특별한 지식인인 것이다. 나폴레옹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대학교 때 기고했던 ‘특별한 사람’ 이론을 시험이나 하듯이 2명을 도끼로 살인하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물질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돈에는 손도 대지 않고 땅 속에 돈과 귀중품을 묻어 두고, 버젓히 길거리를 다니며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나이든 여자를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을 죽인 것이며, 사람이 아니라 이론을 죽였다는 표현도 있다. 20년간 그를 괴롭힌 가난과 외로움, 사회 부패를 척결하고 싶었으나 결국 신의 섭리를 위반하며 자신을 도덕적으로 죽였다는 뜻일까?
인간은 평생 ‘선과 악’의 양극단에서 싸울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던가? 대의 명분을 위해 2명을 죽였다고 생각했으나 죄책감, 편집증, 정신 분열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동생 Dunya, 친구 Razumikhin의 변함없는 사랑과 일관된 정서적 지지로 그는 외롭지 않았다. 무엇보다 Sonya의 헌신적 사랑으로 인해 그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그의 살인을 처음 고백했던 사람도 Sonya이다. 그녀는 인간의 사랑을 뛰어넘는 기독교적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Sonya가 그에게 읽어준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었던 나사로처럼 그는 결국 Sonya의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Sonya는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상징하는가? 결국 하나님은 죄책감 없이 2명을 살인한 인간도 사랑하시어 Sonya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
죄과 악은 결국 선과 사랑으로, 인간의 죄악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밖에 구원할 길이 없다는걸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세상에 난무하는 부정과 부패, 타락을 인간이 심판주가 되어 악을 척결하려는 교만은 더 큰 죄악을 낳을 수 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위대한지, 결국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책의 분량이 너무 많고 하루의 피곤함은 눈꺼풀을 무겁게 하였으나, 이 책만큼 결론이 궁금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결론을 오해하고 있었던 탓에, 마지막 장을 읽을 때 부정이 아니어서 너무 행복했다. 희망적인 결론도 너무 너무 감사하다. 문학적 장치나 문체보다 스토리 중심으로 장기간 읽으면서 지루하지 않았고, 작가가 어떤 방향으로 결론을 도출할지 가장 궁금했던 책이다.
어쩌면 내가 기다린 것은, 죄인이었던 주인공이 용서와 구원을 받은 것처럼, 나 같은 죄인도 사랑받고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메세지였던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