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진정한 즐거움은 리뷰 작성에 의해서 완성이 된다. 리뷰를 만족스럽게 쓰고 나면, 읽는 것 이상의 기쁨이 내 가슴속에 차오르고,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끝낸 느낌이 든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것은 쉽고 편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리뷰 쓰는 일은 가장 피하고 싶고 부담이 되는 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읽는 동안 행복했고, 많은 감동을 받은 책에 대해 리뷰를 쓰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매 순간, 나의 부족과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불신자와 신앙이 있는 자 둘 다를 위해 쓰인 책이다. 전반부는 무신론자 및 회의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고, 후반부는 신의 존재, 죄, 십자가, 부활 등에 대하여 역시 맹목적인 종교로서가 아니라 다양한 논거에 근거한 의견을 제공한다. 그 누구도 성공하리라 예상치 못했던, 20, 30대 싱글이 주를 이루는 맨해튼의 교회 목사로서 성공한 탓인지 조금 더 개방적일 것이라 추측했으나, 믿음에서만은 회색지대가 없으신 듯 보인다.
그럼에도 무신론자나 회의론자들을 향한 그의 마음은 다른 분에 비해서 더 열려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불신자들은 오히려 우리의 기도와 따뜻한 마음이 더 필요한 사람들이며, 회의론자와 신앙인들조차도 개인적인 반대나 맹목적 신앙과 항상 치열한 싸움을 할 수 있고, 의심을 의심해야 한다는 말씀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You must doubt your doubts.) 나 역시 교회를 다니면서도 회의적인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나의 회의적 사고가 너무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나의 회의적 사고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싸워 나갈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완고한 회의론자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그들 자신의 인지력(cognitive faculty) 안에 엄청난 믿음(faith)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수 있어도, 회의론자들조차도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의심은 실상 대안적 믿음이라 불릴 수 있고, 기독교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 서로 다른 방법으로 배타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기독교는 배타적이며 구속력을 가진다기보다 오히려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는 종교이다. 물고기는 단지 물에서만 살도록 제한될 때 진정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듯이, 자유란 자신에게 가장 옳고 적합한 것을 찾게 하는, 자유함을 주는 구속력(liberating restrictions)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구속이나 제한은 진정한 자유를 위한 적극적인 수단이 되며, 절제와 제한은 그렇지 않으면 안에 갇혀서 발휘하지 못할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게 한다. 기독교가 지니는 아름다운 구속력에 대한 설명은 매우 인상적이고 설득력이 강했다.
신앙인들의 이중성, 교회의 역기능에 대한 반박도 일리가 있다. 교회는 성자들의 박물관이 아니라 미성숙하고 상처받은 죄인들이 모인 병원과 같은 장소(The church is a hospital for sinners, not a museum for saints.)라는 데 공감한다. 마음 아픈 사람들이 갔다가 상처받고 떠나는 장소가 교회이기도 하다. 세상에 의인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을 기억하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않으면 사람으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을 수 있기에 신중하게 교회를 고르라고 충고한다.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은 아직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며, 그들은 부족하기에 교회를 찾아온 나약한 사람들이며, 정서적·도덕적·영적으로 성숙하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세상 사람들의 비난과 상처는 큰 기대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고, 사랑을 베푸는 장소여야 한다는 큰 기대감 때문에 사랑으로 덮지 못하고, 사랑으로 용서하지 못할 때 기독교를 향해, 신앙인을 향해 돌을 던지며 비난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가 지니는 큰 책무감이 있다. 실상은 기독교가 보여준 순기능과 사회에 끼친 선한 영향력도 많다. 시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Martin Luther King Jr.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을 당겼을 것이다. ‘Let justice roll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as a mighty stream. Amos 5:24’. 결국 기독교가 인종차별의 해독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한편, 사랑·공의·정의의 하나님이신 것은 받아들이지만, 심판과 노여움의 하나님이심은 용납하기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곧 심판의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사랑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심판과 노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분노는 사랑의 반대말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심판이 없다면 인간에게 과연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의구심이 든다. 인간적인 생각, 가치관, 판단으로 정죄하거나 비난하고 심판하려는 것도 위험하고, 오히려 하나님만이 심판주가 되어야 이 땅에 공의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저마다의 원한과 분노를 자신의 능력으로 풀고 타인에게 갚으려고 할 때 이 세상은 아비규환이 될 것이며, 신의 분노가 없다면 악인의 권력은 무서움과 절제력을 알지 못할 것이다.
성경의 특정 구절에 대한 지협적 해석으로 성경 전체의 큰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대한 설명도 있다. 나 역시 과거에 성경을 제대로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성경이 2000년 전에 쓰여진 이야기이고, 문화적·역사적 거리가 있다는 것을 무시한 채 특정 부분만 떼어내어 퇴행적·보수적이라 속단하는 사례가 많다. 어떤 이단들은 요한계시록이나 선지서 부분만을 오해하여 심판의 하나님만으로 오역하며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progressive’라는 기준으로 성경을 ‘regressive’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한다. 몇십 년만 지나면 현재의 progressive는 또다시 regressive가 된다. 진보 혹은 퇴행이라는 단어의 기준으로 재단하며 성경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지 못하면 핵심 원리를 파악할 수 없다.
과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계몽주의 이래로 우리는 이성과 논리의 원리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신의 존재가 시험대에 올라야 하고 정당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과연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과학과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이타심과 도덕적 의무감은 과연 이성과 합리성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은 아니다. 마치 우리가 태양이 떠 있다는 것을, 태양을 보고 아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보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즉 우리는 태양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고, 태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볼 수가 없다. 늘 찬란하게 우리 곁에 빛나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강해서 태양을 바라볼 수가 없다. 그러나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듯이, 어쩌면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현실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갈망하는 것에 대한 부재를 느낀다. 이는 ‘축복받는 갈망(blessed longing)’이라고 했다. 즉, 현실의 욕구를 모두 채워도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인간은 원하고 있고, 그 공간은 오직 신만이 채울 수 있다고 했다. 이 자체가 신이 존재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만, 이를 억누르고 있을 뿐이며, 만약 신이 없다면 사랑, 이타심, 도덕적 책임감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만약 진화론적 사고로 모든 것이 정당화되고 입증될 수 있다면, 인간은 왜 마음속에 선한 삶에 대한 욕구와 갈망이 있으며, 물질적 만족이 있음에도 빈 공허감을 느끼는 것일까?
Victor Hugo의 Les Misérables의 예시는 매우 감동적이다. 신부의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용서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공격이 되어 뿌리 깊은 자기 연민과 고통을 벗고 주인공 인생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은혜와 감사의 역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은혜는 인간은 자율성을 지닌 존재라는 허상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즉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는 달라질 수 없었으나, 신부가 베풀어준 무조건적 은혜로 인해 한 사람의 생애가 달라졌다. 이렇게 부족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나 공적 때문에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구원받는다(salvation by sheer grace). 만약 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약하고 힘없으며 나약한 자는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 것인가?
믿는다는 것은 현재의 나와 바라보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새벽 기도에 참석하고, QT를 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인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면 죽은 믿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을 알고, 예배하고, 기뻐하며, 그를 닮아가려 노력하는 삶을 살라고 한다. 전심으로 사랑하면 닮아가고, 닮은 꼴이 되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신앙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평생의 과제를, 삶의 목적과 의미를, 행복의 원천을 뒤늦게 알았지만, 지금도 빠른 시간이라 위로하며 도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