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에 감동을 더하고 밤을 지새며 읽었던 톨스토이의 두 작품,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8)‘와는 결이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1881)’ 와도 다른 색깔의 작품으로써 많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이 책은 1886년에 발표된 책으로 톨스토이의 신앙적 고뇌가 담겨진 책이라 들었다. 정통 러시아 정교회와 국가 권력의 결합, 형식적 교리와 의식에 회의를 느끼던 그가 기독교에서 새로운 내적 질서를 찾아가는 과도기적 시점의 작품이라 들었다.
톨스토이의 깊은 고뇌가 어쩌면 바로 모든 인간의 원초적 궁금증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이반의 죽음은 살아 생전보다 더 근엄하고, 살아 있는 자들에게 보내는 꾸짖음과 경고처럼 보인다고 첫장을 시작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세지는 무엇일까? ‘항상 죽음을 기억하라’,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 평등하다’ , ‘죽음의 불가피성을 기억하며 유의미한 삶을 살아라’ 등등의 사인일까? 죽음이란 단어 앞에서 작아지지 않는 자 누구인가?
살아 있는 자들의 슬픔과 눈물은 죽은 자를 위한 것인지, 살아 남은 자를 위한 것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정되어 있으나, 이미 죽은 자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이, 마치 내게는 부자연스럽고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평소에 행동을 한다. 알지만 일시적으로 애써 부인하려는 인간의 연약한 자기 부정이 아닐까? 죽음은 터부시해야할 주제가 아니라 현재 시제로 늘 기억하며, 하루를 헛되이 살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나침반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반의 삶의 목표는 쉽고, 유쾌하고, 품위있게 사는 것이었다. 가족에게 조차 품격있는 거리(dignified aloofness)를 유지하며 자신의 편안함과 취미를 침해 당하면 안되는 사람이었다. 불편하고 지저분하며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와는 무관한 삶이었고, 그 주변에는 그와 비슷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 뿐이었다. 삶의 흐름과 질서가 늘 있어야 할 곳에, 가장 어울리는 세련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겉으로 보이는 풍요와 안정된 삶이 그의 행복을 정의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질병이 심해지면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해야하는 그에게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외로움이었다. 아내와 1남1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평온한 삶이라 생각했으나, 그는 철저한 외로움을 느끼며 그의 삶 전체가 거짓과 사기였음을 알게 된다. 오직 한 가지, 그가 죽는다는 것만이 진실일 뿐 무기력, 외로움, 인간과 신의 잔인함, 신의 부재를 느끼며 아이처럼 울고 있는 이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성공가도를 따라 성실하게 노력하며 살아온 그가, 왜 고통을 받아야 하고, 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은 그가 평생을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닌지 생각을 하게 된다. (What if my whole life had been wrong?)또한, 어쩌면 해야할 것을 하지 않고 살았던 것은 아닌지 깨닫게 된다. 갑자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가슴과 옆구리를 맞게 되고 숨쉬기 조차 힘들어진 그가 구멍으로 떨어져 바닥에서 빛(light)을 보게 된다. 그 때 그는 실제로는 앞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결국 무엇이 옳은 일인가? (What is the right thing?)를 생각한다.
결국, 그는 그 빛을 잡고, 비록 그동안 틀린 방향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 왔으나, 잘못 살아온 삶도 여전히 수정되고 교정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구멍의 바닥에 있던 그가, What is the right thing? 이라는 질문을 하고 나니, 누군가가 그의 손에 키스를 했고, 눈을 떠 보니 아들이 그를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동정심과 연민을 얻은 두 사람은 하인(Gerasim)과 아들뿐이었다. 친구와 가족이라는 이름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돌아보게 된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서운 상황보다, 혼자라는 처절한 외로움과 나약함으로 절규하며 건강하지만 냉소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을 향해 비난과 원망을 쏟아내던 그가, 이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 놓고, 죽음의 자리에 빛이 있음을 알게 되며(In pace of death there was light.) 편안하게 숨을 거둔다. 건강하고 부유하여 모든 것이 평온할 때, 이반은 자신이 가는 길에 대하여 옳은 방향인지 점검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앞으로가 아닌 뒤로 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반 같은 속물에게도 빛(light)은 여전히 기회를 주고 있다. 그의 삶이 바뀔 수 있고 교정될 수 있다고 하고 있다.(though his life had not been what it should have been, this could still be rectified.) 이 얼마나 희망적인 메세지인가? 그래서 이반은 죽음 자체가 영원한 끝이 아니며, 죽음의 자리에 빛(light)이 있음을 알게 되어,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했으리라 생각한다.
비판적,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톨스토이가 완전히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쓰여진 책이 아니라 할지라도, 빛(light), 아들(son), 교정되는(rectified)이라는 실마리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내 나름의 해석을 할 수가 있다. 죽음을 앞두고 빛을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고, 빛이 있음을 알 수 있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적으리라. 나처럼 뒤늦게 잘못 살아왔음을 알고 가슴을 칠때,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 교정, 구원의 기회가 있다고 말해 준다면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 삶의 목표, 의미, 방향성을 늘 점검하고, 죽음을 기억하며(Memento Mori), 게으름 피우고 싶을 때 몸을 더 움직이고, 나 자신만의 유익과 편의만를 도모하는 삶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