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의 힘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 느낀다. 밤을 지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던 때가 언제인가? 도서관에 앉아 6시간 동안 독서 삼매경에 빠지거나, 공원벤치 조명 아래서 시원한 바람을 친구 삼아 책을 읽으며 여름 더위를 쫒던 적이 아득한 옛날같다. 이제는 한 권 끝내기가 쉽지 않다. 새벽예배를 작정하고 나서는 늦게 잠을 잘 수가 없고, 일이 쏟아지면 피곤함에 도저히 시간이 안난다. 그럼에도, 전혀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유투브에 시간을 빼앗기며 시간 낭비했던걸 생각하면 후회가 많이 된다. 올해는 다시 책사랑을 실천하며 마음을 살찌우고 궁극적으로 정신근육을 단단하게 만들어 보자!!
사실 이 책은 직장 신우회에서 함께 읽기로 지정된 책이었으나, 다들 읽지 못해서 나눔은 하지 못했다. 나의 지론은 한 권의 책을 적어도 2주 안에, 빠르면 1주 안에 끝내야 제대로 감동을 느낄 수 있고 내용을 잘 파악할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난 1달이상 띄엄 띄엄 이 책을 읽어서 리뷰 쓰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큰 울림이 있었고, 성경을 읽으며 궁금했던 것도 해갈을 얻은 듯하다. 알면 보인다고 했는데 성경 통독을 겨우 한 상태라 작가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많기에 앞으로 더욱 성경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난 구약이 엄청 어렵다고 생각지는 않았는데, 현대인들이 신약에 비해 구약을 잘 읽지 않고 필요성도 못 느낀다고 했다. 그러나 신약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구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도 구약의 성경 구절을 많이 인용하셨고, 구약에서 예수님이 오심을 여러 군데서 예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은 그저 수천 년 전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이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다. 구약을 읽기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의 러브 스토리처럼 읽으라고 충고한다. (read it like a love story)
구약 중에서, 욥기(Job), 신명기(Deuteronomy), 시편(Psalms), 전도서(Ecclesiastes), 선지서(Prophets)에 관한 작가의 해석이 있다.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설교를 피하는 욥기에 대한 설명은 큰 도전이 아닐까 한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전쟁, 슬픔 등을 잘 인내하면, 즉 연단을 통해 정금같이 단련되어 나온다는 해석에 초점이 아니라 ‘욥의 믿음’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는 조건부나 보상/징계라는 계약적 신앙을 넘어서는 욥의 신앙을 보고 싶어하신 듯하다. 욥의 고통은 아주 작은 재료에 불과한데 우리가 재료에 갇혀 큰 음식의 맛을 느끼지 못하거나, 등장인물만 보다가 드라마의 주제를 놓치는 경우랄까? 욥기를 통해 단 한 명의 믿음, 반응도 하나님에게 매우 소중하다는걸 알게 되었다.(One person’s faith made a difference. How we respond matters.) 작가는 욥기를 통해 ‘믿음의 회의‘에서, ’의심 가운데 믿음‘으로 나아길 수 있었다고 했다. (with doubt in my faith - with faith in my doubt)
작곡가로 비유하면 신명기는 장엄한 확신으로 볼 때 바흐에 해당된다고 했다. 신명기는 기억하라 잊지말라를 강조한다. 어리석은 황소가 고집 때문에 고통에도 하루종일 멍에를 메고 있듯이 목이 곧은 백성들은 교만하여 평안시에 과거의 은혜를 잊기 쉽다는걸 모세는 너무 잘 알았다. 온유함이 온 지면에 가득했던 모세도 한 때는 살인자가 아니었던가? 그의 성정을 부드럽게 만드신 하나님이 백성들을 공급하고 또 공급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경고(warning)의 메세지가 신명기이다. Choose life. For the Lord is your life.
시편은 수 많은 모순과 감정의 롤러코스터로 가득차 있다. 교회에서는 억제하려하는 분노를 사정없이 표출하다가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로 반전되기도 한다. 인간의 나약함, 극도의 슬픔과 아픔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감으로써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알려준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 자체가 치료 효과를 발휘한다. 미움과 증오가 어느새 물러가고 그 자리에 용서의 기적을 위한 씨앗이 자라나는 걸 볼 수가 있다. 만약 사람에게 복수의 저주를 쏟아내면 독화살이 되지만 하나님께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적으로 의지하며 나아가 간청함으로 고침과 치유를 얻을 수 있다. 한편, 시편은 찬양이 부족한 문화에서 필요한 단어를 제공하며 찬양하고, 송축하고, 기도하는 법을 잘 알려준다.
무상함과 절망의 탄식을 노래하는 전도서와 지혜와 명철을 강조하는 잠언이 나란히 배치함은 어떤 의미일까? 모든 것을 다 누렸던 솔로몬은 지나친 풍요의 토양에서 실존적 절망감을 느낀 것일까?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게 됨의 저주라고 했다. 전례없는 풍요와 사회적 진보의 시대에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여 실존적 불안감을 느끼는 현대의 우리와 닮았다. 우리도 가끔 왜인지 모르나 이유도 없이 무상함과 낙담을 느끼지 않는가? 결국 신의 존재를 믿고, 창조주를 기억하고 경외하며 존재의 의미를 찾고 순종함으로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 선지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이며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고 지낼 때 하나님이 얼마나 슬퍼하시는지 등에 관한 하나님의 마음과 느낌을 가장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작가는 마지막에 3가지 질문을 던진다. Do I matter? 나 한 명이 하나님에게 중요한가? 이사야 49:16절을 통해 한 명 한 명이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설명한다. 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Behold, I have engraved you on the palms of my hands.) 예수님은 언제나 사랑의 막대기로 약한자 편에 서서 공생애 생활을 하셨다. 한 영혼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얼마나 기뻐하셨는가? 두 번째 질문은 Does God care?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가? 왜 악의 세력이 형통한데 침묵하시는가? 신약에 예수님이 눈물 흘리시고 우리와 같이 아파하시는 장면이 많다. 우리와 하나님의 시간표가 다르니, 결국 하나님이 골든 타이밍을 기다리신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질문은 Why doesn’t God act? 구약 백성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모세와 대면하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 보인다. 그러나 창조주의 미완성의 프로젝트는 언젠가 완성될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다.
모든 신학적 궁금증이 해갈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많은 도움이 되었다. 나 또한 전도서 작가 솔로몬과 같은 고민과 절망으로 허무감과 좌절을 느꼈던 때가 있다. 시편 기자의 기도를 하나님께 자주 올렸더라면 사람에게 상처내는 일이 줄었으리라. 신명기를 일찍 읽었더라면 평안의 시기에 은혜를 기억하며 교만을 멈추고 겸허하게 무릎을 꿇었으리라. 욥기를 잘 해석했더라면 작고 작은 나의 믿음 하나도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음을 알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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