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뭘 망설이는가. 할 수 있을 때 장미 봉오리를 모으라!
힘 있는 책들이 있다. 2019년 1월 1일, 새해 목표로 잡았던 일들을 미루며 뭉게고 있을 때, "당장 해보자!"며 등 뒤에서 있는 힘껏 밀어주는 그런 책들. 문소영 작가의 <광대하고 게으르게>는 그런 면에서 힘이 세다.
책을 읽기 전, 제목과 표지만 보면, 낮잠 후에더 아직 나른함에 취한 느낌이 든다. 제목 중 '게으르게'에 방점을 찍었달까.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웅크렸던 의욕을 이제 막 발산하려는 여인으로 보인다. '잘 잤다. 이제 시작하자!'며 기지개를 켜며 손과 팔로 큰 원을 그리기 직전의 모습이다. 여기서는 '광대하고'에 마음이 가버린 것이다.
이 책은 책, 그림, 음악, 영화 등 전 예술 분야를 넘나들며, 삶의 태도에 대해 정리한 에세이집이다. ‘예술’을 공통분모로 삼았을 뿐, 메시지들은 지루할 틈 없이 다양하다. 명절, 페미니즘, 성실, 운, 욕망, 자존, 메멘토 모리와 카르페디엠까지. 다양한 주제는 넓은 과녁이나 마찬가지다. 신은 신발이 각자 다른 독자들의 마음은 넓은 과녁 중 어느 한 곳에 꽂히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내 상황에 꼭 맞는 문장들 덕분에 잠시 멈췄던 글쓰기에 용기를 냈다.
1. ‘운’에 대하여
나는 ‘절약’에 대한 글을 쓴다. 번 돈 보다 적게 쓰고, 비참하지 않은 우아한 절약을 하면서 좀 더 단단하게 살자는 글들이다. 그런데 한 동안 글이 손에 안 잡혔다. 절약을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나의 상황이 순전히 ‘운’이니까,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돈 덜 쓰는 삶을 권하기 미안했다.
매일 빗자루로 방을 쓸고,하루 한 번 한아름 쏟아지는 땀 냄새 절은 여름 옷들을 빨아 다리 부러진 건조대에 널었다. 냉장고 속 식재료를 매번 살피며 겹치지 않게 장을 봤다. 삼 시 세끼 조리대 앞에서 30분 요리 후, 밥 먹고, 다시 20분 설거지를 했다. 나에게 무선 청소기, 건조기, 외식, 식기세척기 등은 '필수품을 가장한 사치품'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거 맞벌이 부부가 할 수 있어? 생계형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공부도 뒷전인 청년들에게 가능해?
의심이 시작되자, 위축되었다. 정답 없는 세상에 내 취향이 옳다며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타인을 고려하지 않은 무례한 외침으로 누군가는 아팠을지도 모른다.
262쪽.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해?"
내가 계층, 연령, 성별 등을 생각하며 갈팡질팡 답을 고르고 있을 때 선생님이 다시 말했다.
"자수성가한 사람"
"난 노력해서 그 모든 난관을 극복했는데, 왜 너는 못하냐, 왜 세상 탓만 하느냐고 그 사람들은 또 묻지. 강철 같은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지만 그런 강철 같은 자세로 다른 사람들을 보지. 그런데 그 사람들의 성공에 과연 운이 전혀 없었을까?"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춤추듯 절약을 즐길 수 있던건 운이 좋았던거다. 남들이 가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갖추고 있다. 양가 부모님께서 하루가 멀다하고 듬뿍 얹어주시는 식재료들, 엄마에게 심하게 조르지 않는 두 딸, 아내를 존중하는 남편, 그리고 최신 전자제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가사노동 할 수 있는 시간과 건강. 더불어 함께 절약하는 절약모임 멤버들까지.
나의 '운'을 '노력'인 줄 착각해선 안 되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남을 돌아보지 않는 일방적인 '절약 글쓰기'는 글쓰기 윤리에도 어긋나니까.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다물고 싶지 않은건.
나는 여전히 절약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전처럼 오마이뉴스 기사, 그리고 브런치에 절약 글을 올리지 못 하고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여건 덕분에, 적은 돈으로도 삶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가지고 있는 것' 중 '남들은 가지지 못 한 것'이 있을까봐 조심스러웠다.
59쪽. '내가 가진 것들'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 대해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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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동시에 나는 내가 가진 것들 덕분에 겪지 않는 불편함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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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식이라면 모든 문학과 예술은 획일화된 한 종류만 남을 것이다. 왜 세상에 추악한 부분이 많다고 해서, 그와 함께 엄연히 존재하는 아름다운 부분에 초점을 맞춘 작품을 만들면 안 되는가.
그런데 책의 이 구절로 인해 용기가 생겼다. 안정적인 직장에 빚 없이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 돈 보다 적게 쓰는 삶에 대해 계속 글을 쓰고 싶었다. 최소한의 소비에 집중해 온 3년, 내가 겪은 변화가 많은 이들에게 닿길 바랐다.
돈에 흔들리지 않을 때, 원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 돈이나 지위를 기준으로 위계를 나누며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내가 무엇을 경험할 때 행복한지 묻고 답하는 시간 갖기. 돈을 주고 남들이 만들어준 물건과 서비스를 소비하기보다, 내 몸을 움직임으로써 할 줄 아는 재주 늘리기.
순전히 내가 가진 것들이 운이라 생각해서, 이런 아름다운 일상에 대해 입을 다물고 싶지는 않다. 용기가 나니, 마음이 동동거렸다. 오랜만에 오마이뉴스 최소한의 소비 연재 기사 한 편 보냈다. ‘절약에 철학이 있어 멋지다’는 독자의 댓글을 보니, 문소영 작가의 말처럼 ‘그저 입을 다물지 않길’ 잘 했다.
3. 절약으로 꽃피고 싶다.
조금더 욕심을 내어, 절약으로 꽃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꽃핀다'는 말이,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인식하지 못 하고 있었으나, 문소영 작가의 문장 덕분에 내가 원하는 성공의 유형이 명료하게 다가왔다.
13쪽. 내가 생각하는 "꽃핀다"의 의미는 유명해지는 것보다도 자기 분야에서 스스로 인정할만큼 독창적이거나, 새로운 경지의 뭔가를 이뤄서 극소수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거나 생각을 전환시키고, 장기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어차피 많은 돈과 삶의 즐거움이 비례하지 않을만큼 절약훈련을 한 상태다. 큰 돈이 없어도 삶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절약 글을 계속해서 쓰는건, 유명세를 타기 위함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다. 단지 누군가의 삶에 가 닿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더 욕심내어 '꽃피는' 경지에 이르고 싶다. 소수의 마음만을 움직이는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전환시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독단이 아닌, 많은 이들이 가지지 못 한 것까지 고려한 절약 일상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4.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아!
49쪽. 그러니까 이 시의 제목인 '가지 않은 길'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내가 가지 않은 길'이며, 이 시는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이 생기는 인생의 아이러니에 대한 이야기다.
...
어떤 길을 택하든 가지 않은 길은 단지 가지 않았기에 아름답다.
'안 쓰고 사는'만큼, '좀 쓰고 사는' 삶에 대해 먼 훗날 한숨 쉬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프로스트의 <가지않은 길>처럼 말이다. 그러나 미련은 없다.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으려 한다. 그게 현재 내 삶에 대한 존중이자, 죽음을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279쪽. 하지만 그걸(죽음) 자꾸 상기시켜서 어쩌자는 걸까? 답은 워터하우스의 그림에 있다. 소녀가 자기 뺨처럼 핑크색인 장미 한 다발을 들고 말한다.
"그러니까 할 수 있을 때 장미봉오리를 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