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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아 놀자
  • 신화의 식탁 위로
  • 오선민
  • 17,100원 (10%950)
  • 2023-07-20
  • : 907


"신화를 음미하며 대칭을 살아 내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순서를 잘 찾기란, 자연 전체의 계절적 배치를 읽는 가운데 그 한 부분으로 자기를 밀어 넣는 일입니다."(오선민, 『신화의 식탁 위로』(북드라망), 125쪽)


'신화'라고는 단군신화만 알았던 내가 처음 야생의 인디언을 공부하며 여러 번 의미를 찾았던 기억이 난다. 야만의 원시 부족 삶에 대해 왜 알아야 하지? 열등한 사람들의 사고가 지금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지? 오선민 작가의 이전 책 『슬픈 열대, 공생을 향한 야생의 모험』과 인류학 공부를 통해 벌거벗고 아무데서나 누워 잠을 자고, 얼굴에는 이상한 무늬를 그리는 원시 부족들이 나름의 계획과 생각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남루하고 글자도 모르고 무지하다고 생각했던 원시 부족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살았다고 하니 1차 충격과 보여지는 대로 판단한 것에 부끄러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후 그들의 사고는 자나 깨나 우주 만물과 '함께' 생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원시 부족민이 삶에 어떻게 감각하는지 가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신화이다. 오선민 작가는 이번 책 『신화의 식탁 위로』에서 혼자 읽으면 도저히 해석도 이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 인디언 신화를 우리에게 멋스럽게 맛나게 잘 차려 놓으셨다. 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물컵까지 셋팅 완료인 느낌이다. 이제 우리에게는 실컷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소화시키는 일이 남았다.


균형을 위한 아침

친구들과 2주 동안 매일 아침 6시에 신화 소화하기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친구들은 이번 책에서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당연한 것이 대칭적 사고는 만물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것인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A와 B는 균형 감각을 키우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이야기했다. '먹기'의 철학이 시대마다 다른 차이가 있을 것 같고, 신화에서 타자들이 누구의 무엇으로 사는 존재임을 보게 되어 스스로도 그런 의미로 자신을 보고 싶다고 했다. C은 수예를 잘 짜는 사람처럼 부지런히 능력을 가꾸는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D는 전체의 질서를 조망하는 능력이 청소와 관계있음에 관심을 보였고, E는 책 전체에서 말하는 균형적 사고가 결국에는 풍요로운 사회처럼 보인다고 했다. 오늘날 '풍요'의 의미와 완전히 다른 야생의 '풍요'는 균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F는 아침 낭송에 참여하고 별도로 마을 지인들과 한 번 더 읽을 계획이라고 했다. 아침 낭송의 기운이 좋은 방법으로 순환되는 것 같아서 내심 기쁘기도 했다. F는 식사와 청소 그리고 치히로의 예禮를 다한 인사에서 모두 타자를 보고 가는 관계의 철학임을 배웠고, 일상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아침 낭송이 각자의 삶에서 균형 감각을 키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차이'를 생각하는 밤

일요일 밤에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신화의 식탁 위로』 읽고 후기를 나누었다. 원시 부족들은 자기와 타자가 서로 차이가 있음을 끊임없이 사고했고 심지어는 싸움해서라도 그것을 지켜냈다. 식인도 같은 이유에서 행해졌다. 차이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일이고, 모든 만물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를 화나게 하는 타인에 대해 그렇게 마음 쓸 필요가 뭐있을까 싶기도 하다. 어쩌면 그도 자기 세계에서 나름의 방법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는 공동체의 균형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를 질문했는데, 너무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것에 대해 친구들은 공동체의 조화를 위해 만물의 동등성을 이야기하는데 그 동등성이라는 것이 그때그때 위계가 달라진다고 이야기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는 평등은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되곤 한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에서는 그런 평등은 없다. 만물이 역동하는 질서 속에서,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속에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에서는 근대인의 고정된 '자기'와 다르게 그때그때에 맞는 자기가 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선민 작가가 해석한 신화 속 사냥꾼은 상황마다 다른 옷을 입고 벗으며 타자가 되기를 노력했던 것 같다. 유능한 사냥꾼은 다름을 인식하고 때에 맞게 장소에 맞게 변신하는 사람이었다.


세계를 한 발 확장하는 공부

야생의 사고를 배우는 것은 큰 쓰나미를 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어서 생각의 전환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내가 감동했던 것은 공부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인류학 공부는 정보를 습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선민 작가의 책처럼 이건가? 저건가? 정답인지 아닌지 모를 그 길을 계속 탐구하고 나의 세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마 이 말도 예전의 나였다면 이상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정답이 얼마나 좋은가! 정해진 길을 찾아가는 일은 안정되고 성공한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정답을 누가 정하느냐이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답지에 따라 살아가는 일은 인류학 공부에서는 없는 일이다.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를 신화의 관점으로 해석하면 나의 자리, 전체의 상황과 조건 속에서 그 정답이 계속 달라진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선민 작가의 『신화의 식탁 위로』가 어렵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책을 다 읽고 친구들과 세미나를 하고 보니 그 알기 어려운 신화를 더이상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의 사고는 자기 중심으로 움직이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들의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라진 것들이 사라질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사고에) 다른 것들이 가득 차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45억년이라는 나이를 가진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하나의 존재로 살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내 삶에서 대칭적인 사고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거리를 한뭉탱이 던져주신 인류학자 작가님께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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