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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둥아 놀자
  • 오강남의 생각
  • 오강남
  • 16,200원 (10%900)
  • 2022-06-24
  • : 791

(출처 인문공간 세종)

 

나에게 종교는 모태신앙으로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어린시절 우리집 TV 옆에는 성스러운 십자가와 성모마리아, 예수님상이 밤이고 낮이고 우리를 지켜주는 듯했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하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종교에 자유가 있다고 하셔서 무척 놀랐다. 매주 성당을 가는 일이 싫었기에 집에 가자마자 종교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가 등짝 스매싱이 날라왔다. 토요일 주일학교를 가기 위해 집에서 나서는 순간부터 죄책감은 늘 짝꿍처럼 붙어다녔다. 가기 싫은 불온한 마음을 분명 신께서 아시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한 고백성사는 어딘가에서 저지른 나의 죄를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숙제를 안겨주었다. ‘내가 죄를 지었던가? 그날 그 행동은 죄라고 할 수 있나? 아! 모르겠다. 할 말이 없으니까 일단 죄라고 치고 고백하자.’ 이 이상한 상황의 연속에도 성당에 착실히 나가고, 신부님께 죄사함을 받으면 전지전능한 신은 언제나 나를 굽어살펴 주시리라는 믿음을 오랫동안 의심해 보지 못했다.

오강남 선생님은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주야장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하며 무릎을 꿇고 빌며 죄책과 두려움에 살아야 하는가”라며 질문하신다. 물개 박수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선생님은 종교의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루는데 여기서 ‘근본주의’는 성경에서 하라는 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정도에 그치느라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따져보지 않고,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맹꽁이 청개구리의 후손을 자처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동안 맹꽁이로 좀 살았으니 선생님의 책을 읽고 우물을 벗어날 때도 된 것 같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동안 생각해오던 ‘신’, ‘신앙’, ‘종교인’, ‘기도’ 등 종교에 대해 다시 이해하고 싶어졌다.

선생님은 참된 의미의 종교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어나와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고 ‘아하!’하고 놀라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사물의 실상, 혹은 실재(Reality)의 보이지 않던 다른 면, 혹은 다른 차원을 발견하여 새로운 변화를 체험하고, 이 결과 옛 사고방식이나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게 된다는 뜻’(138)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깊은 종교심을 지녔었다고 소개하며 그의 글을 인용한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경험은 ‘신비스러움을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의 진지한 노력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심층에 깔린 기본 원리다.‘(145) 책에 따르면 신비주의는 ‘신을 체험적으로 인식하기’(180)이다. 그것은 하느님, 절대자, 궁극실재를 몸소 아는 것이다. 영적으로 눈이 열릴 때, 내면의 깨달음을 얻을 때, 우리는 변화를 직접적으로 겪으며 체험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종교가 완전히 다른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라면 매일 보는 책이,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자. 선생님은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두가 하나이며 우리는 그것의 일부임을 아는 것이 종교의 핵심’(147)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먹는 밥이 있기 위해서는 벼가 있어야 하고 벼가 크기 위해서는 땅도, 물도, 공기도, 해도 있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쌀 한 톨 속에 온 우주가 다 들어 있다는 것이다. 쌀 한 톨 속에 우주가 다 있다면 내 속에도 우주가 다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종교는 절대적인 하늘 신을 모시는 일이 아니라 자기중심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중세에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앙의 목표를 ‘신이 되는 것’으로 삼았는데, 그 의미는 신에게 맞서는 ‘오만이나 신성모독이 아니라 지금의 내가 없어지고 내 속에 거하는 신이 바로 나의 본래적 나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겸손’(153)이었다.

심층 차원의 기독교는 하느님의 나라가 정말로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다고 한다. 「도마복음」에 따르면 ‘계속해서 내 속에, 그리고 내 이웃의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임재를 ‘깨달으라’고’한다. 이것은 하늘과 나와 내 이웃이 하나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진정한 천국의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진정한 하느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 이웃이, 그리고 사회와 국가와 세계가 당하고 있는 고통을 나도 분담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일이다. ‘불쌍히 여긴다’는 의미의 영어 단어 ‘sympathy’ 혹은 ‘compassion’은 문자 그대로 ‘아픔을 함께한다’는 뜻이다.’(126)

오강남 선생님은 참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감사만 하고 앉아 있을것이 아니라 자비를 실천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신의 임재를 실천하는 것으로, 초월을 끌어안는 행동, 그리고 살아있음, 사랑함, 존재함의 선물들을 다른 이들과 나누기를 훈련하는 것’(102)이라고 하셨다. 선생님의 책에서 그동안 생각해오던 종교와는 완전하게 다른 면을 본 듯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겉으로만 하느님의 자녀를 흉내 냈다. 아쉬울 때는 종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며 제발 이번만 봐달라고 그러면 앞으로는 착하게 살겠다거나 다른 이유를 대며 거래하듯 기도했다. 이제 기도를 다르게 해보자. 내가 이익을 얻겠다는 성취를 위한 기도가 아닌 온 우주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기도로. 내 안에 그리스도를 찾고 싶다. 좋은 방법이 따로 없다. 어제와 다른 나로 끊임없이 책 읽고 생각하고 쓰는 수밖에. 자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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