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팟캐스트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제3세계 작가들은 일종의 비주류라는 편견에도 시달려야 한다고 한다. 한 예로 오르한 파묵같은 터키 작가라면 그가 쓰는 소설이 터키인의 민족정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아무 제약없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사유해야 하는 창작자들에겐 자신을 옭아매는 압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터인데 이런 편견은 제3세계와 같은 지역뿐만이 아니라 성별과 인종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여성’이며 ‘흑인’작가인 토니 모리슨 역시 이런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내게 [자비]는 처음 접해보는 토니 모리슨의 책으로 책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느낀 당혹감과 낯설음 역시 그런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연히 ‘흑인 여성’이 미국 사회에서 겪는 인종적, 성적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예상하며 책을 펼쳤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억압과 차별은 특정 인종에 국한되지 않고 너무나 다양했다.
흑인 노예인 프랜시스와 그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인디언 출신인 리나, 혼혈아인 소로뿐만 아니라 백인 지주인 제이콥 바크와 아내 레베카까지도 모멸섞인 대우를 감당해내야 했고
공정하고 너그러운 편이었던 바크의 농장 구성원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차별과 격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심지어 같은 백인 사이에서도 어린 소녀를 “마녀”로 몰아 단죄하려 드는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증오와 폭력은 읽는 이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미국 건국 초기나 지금 한국이나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분리주의가 사회 분위기를 좌우하고 있다는 사실은 뭐가 다를까?
등장인물들간의 갈등은 결말에 가서도 해소되기는커녕 더 깊어진다.
공동체는 깨지고 소녀는 버림받고 고용주와 고용인과의 유대감은 사라져 버린다.
폐허가 되어버린 바크의 새 저택처럼 참담하게 무너져 버린 이들의 공동체에 프랜시스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가 희망이 되어줄 수 있을까.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기적은 신이 내리는 것이지만 자비는 인간이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에게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주지 않는 것‘이 바로 자비라고 말이다.
누구에게도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넘겨주지 않으려면 신에게도 남자에게도 기대지 말아야 한다.
늘 신발을 신어야 했던 프랜시스는 애인에게 배신당한 후 홀로 일어서고 그녀의 발바닥은 단단해진다.
미국 건국 초, 아직 흑인 노예들이 낯설어 ‘니그로’가 아닌 ‘아프리카인’으로 불리던 시절에 흑인 노예의 딸로 태어난 소녀가 맨발로 집을 나선다. 우리가 아는 미국 역사대로라면 그녀와 그녀의 후손들 앞에는 더 끔찍한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 상대방에게 모든 적의와 저주를 쏟아붓는 일은 참 쉬운 일이다.
쉬운 일이기에 그것은 ‘주인의 철학’이 아닌 ‘노예의 철학’이다.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타당성 없는 증오에 넘겨주는 것은 절대신이나 권력자에게 의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타인에게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자비’를 베푼다는 것, 우리는 과연 그렇게 강해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