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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한잔

- 다시, 100일 정진,  13일차

<唯滯兩邊/유체양변 /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寧知一種 /영지일종/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으랴>

 

중도(中道)라 함은 ‘가운데 길’ 을 뜻하지 않는다.

이쪽 혹은 저쪽이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상 중도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특히 정치에서 중도를 표방하면 바로 양비론자(两非论者)로 몰리기 쉽다.

중도를 삶의 지표로 삼는 것도 쉽지 않다.

동양의 수 많은 현자들이 중도中道 와 중용(中庸)을 말했어도 우리는 중간 어느 ‘지점’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과연 중도란 무엇인가?

이쪽 과 저쪽 끝의 중간 값이 중도인가?

 

일종평회(一種平懷)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민연자진(泯然自津) 사라져 저절로 다 하리다

 

동양에서 음양(陰陽)사상은 서양의 이분법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중도라 하면 중간 어딘가 쯤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동양 사상에서 음양은 본래 무극(無極)에서 극도로 혼란함이 점차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나왔다.

음과 양은 고정된 것인가? 아니다.

낮과 밤이 구분이 되어 있어도 늘 낮만 존재하고 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늘 변한다. 음양의 이치는 고정됨을 말하지 않는다.

서양의 이분법과는 결이 다르다.  

음양은 조화로움을 우선 시 한다.

낮과 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등등 나누어진 음양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한다.

조화로움이야 말로 음양 사상에서 추구하는 구조를 지녔다.

중용이나 중도 또한 이러한 조화로움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단순히 양변에 치우친 것을 경계해서 가운데 지점을 택하라는 뜻이 아니다.

양 극단을 모두 포함한 조화로움이 바로 중용이자 중도라 봐야 한다.

즉, 양비론이 아닌 양불비론(两不非论)이라고 해야 할까?

선에서는 이를 두고 불이(不二)즉, 둘이 아니다 라고 말한다.

 

음료수를 먹을 때 빨대를 꼽아 먹는다고 치자.

빨대에 앞과 뒤가 있는가? 뾰족한 부분을 앞이라고 부르 건 뒤라고 부르건, 사실 빨대의 양 끝은 앞뒤가 따로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양 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빨대의 중간 부분을 잘라내도 늘 양 끝이 생기고야 만다.

양 극단을 거부하려 해도 양 끝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정치적으로 양 당을 서로 대립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나 중도는 둘 사이에 가운데 끼는 존재가 아니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중도는 양쪽 당으로 부터 소외되고 있다.

그래서 중도를 지킨다는 것은 정말 어렵다.

도의 길에서도 마찬 가지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면 중도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 길인가.

 

유체양변(唯滯兩邊)오직 양변에 머물러 있으니

영지일종(寧知一種)어찌 한 가지를 알 수 있으랴

 

신심명에서는 한 가지 (一種) 를 지니라고 했다.

이 일종이 무엇이길래 모든 분별과 알음알이 가 저절로 사라진다고 했을까?

설마 그 한 가지가 바로 중도일까?

우리에게 중도(中道)를 추구하고 일종(一種)을 얻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제부터는 ‘중도’ 가 무엇 인지를 살펴봐야 할 단계로 접어 들었다.

 

 

주:唯滯: 오직 유, 막힐 체 : ‘滯’ 막힐 체는 ‘속이 체했다, 교통 체증이 심하다’ 등 꽉 막혀 있는 형국을 표현할 때 쓰는데, 막혀서 옴짝달싹 하여 답답한 심정을 뜻한다.

兩邊: 두 양, 가 변: 양쪽 두 가장자리에, 즉 이쪽 과 저쪽 양극단에 있는 상황을 뜻함.

寧知: 편안할 영, 알 지: 여기서 영은 형용사로 ‘어찌 ~ 을’ 으로 쓰임. 즉 어찌~ 을 알겠는가?

一種:한 일, 씨 종:  한 가지 근본, 즉 본래 성품 혹은 근본 자리를 뜻함.

 


By Dharma & Mah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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