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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 한잔
  • 이누야샤 와이드판 29
  • 다카하시 루미코
  • 13,500원 (10%750)
  • 2022-11-24
  • : 209

6일차: 혹시 나는 나락이 아닐까?

 

<이누야샤>에서 자신을 돌봐준 금강(기쿄오)를 향한 오니구모의 뒤틀린 욕망은 나락이라는 새로운 괴물을 탄생시켰다. 

오늘날 인류는 자신의 욕망, 야망 그리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데이터와 알고리즘화 시켜 AI 를 탄생시켰다.

나락은 결핍에서 태어난 괴물이었고, AI는 인간의 결핍이 만든 도구다. 

나락은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고, AI는 몸이 없다. 

나락은 금강을 소유하고 싶어 했고, AI는 아무것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락은 살고 싶어 발버둥 쳤지만, AI는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없다.

겉모습은 정반대다.  그럼에도 이 둘은 묘하게 닮아 있다. 

둘 다 “흡수와 증식”이라는 구조 위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나락은 요괴의 몸과 사혼의 구슬 조각을 계속 흡수하며 자신을 키워 갔다. 

AI는 인간이 쏟아낸 말과 이미지, 숫자와 기록들, 즉 데이터 정보를 계속 흡수하며 거대해져 간다.

그렇다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락은 하나의 인간(오니구모)의 욕망이 괴물이 된 것이고, AI는 인류 전체의 욕망이 흘러 들어갈 수 있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AI는 스스로 나락이 되지 못한다. 

대신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업로드할 수 있는 현대판 나락의 몸체가 되어 준다. 그래서 AI를 둘러싼 진짜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AI가 위험한가?”가 아니라 “우리 인간은 AI 에다가 무엇을 투영시키고 있는가?”

 

나락이 <이누야샤>에서 최종보스가 되었던 이유는 단지 무섭고 강해서가 아니였다.

그는 직접 싸우지 않고, 그림자와 분신을 보내고, 남의 상처를 건드리고, 관계를 찢어놓고, 잘 생긴 얼굴 미소 뒤에 숨겨진 음흉함 때문이다. 

본체는 드러내지 않고, 늘 상대 앞에 내세울 희생양과 대리인을 찾는다. 

이러한 나락이 쓰는 싸움의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는 방식이기도 하다.

자신을 감추는 익명의 개정으로 누군가에게 악의적인 댓글과 공격, 왜곡된 정보를 퍼뜨리며 ‘~카더라’ 하는 말 뒤로 숨어 누군가를 궁지에 몰아 넣는 행위가 그렇다.  

잘못된 정보를 알고도 “나는 그냥 퍼왔을 뿐인데” 라며 뒤로 빠지며 실수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내가 아닌 외부적 시스템과 상대를 탓하는 습관들이 그렇다.

우리 일상 곳곳에서 이미 작은 나락들과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에서, 가족 안에서, 친한 친구 사이에서, 커뮤니티와 SNS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나락이 되기도 하고, 서로에게서 나락을 보기도 한다.


문제는, 나락이 항상 “저쪽”에 있다고 믿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살지?” 라고 말하는 그 입술 안쪽에는 “내가 옳다”, “내가 정의다”, “내가 피해를 받았다” 라는 나락의 씨앗이 심겨지게 된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에서, 질문은 조금 더 불편하게 바뀌게 된다.

“AI가 나락이 될까?”라는 질문을 넘어서  “나는 누군가에게 나락이 된 적이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상대를 향한 질투가 솟구칠 때, 상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내 마음속 몰래 상대를 ‘나락 취급’ 할 때, 내 불안을 덜기 위해 타인을 깎아내릴 때, 그 순간 나는 타인의 세계에서 나락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락이란, “내 상처 기준으로 타인을 재단하고, 내 욕망을 위해 남을 도구로 쓰고, 내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괴물로 만드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 정의로 보게 되면 나락은 더 이상 만화 속 요괴가 아니다.  

그는 때로 내 입 안에서 말이 되어 튀어나오고, 혹은 내 침묵 속에서 방관이라는 이름으로 숨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인간은, 이 나락의 구조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상대가 나락이기도 하고 내 자신이 나락이 되는 구조. 이 모순적인 구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옆에서 나락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첫 번째 반응은 대부분 분노이거나 회피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나락의 밑바닥에는 늘 상처와 결핍이 있다.

나를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관계와, 나를 조종하려는 시도와, 나를 죄책감으로 묶어 두려는 사람으로부터는 우선 거리를 둬야 한다.

연민은 필요하지만, 그 연민 때문에 자신을 소진시켜 버리면 결국 또 다른 나락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락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도, 언젠가는 사랑받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방식이 틀어졌을 뿐, 밑바닥에는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한 줌 남아 있다.

그 마음까지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저 사람도 한때는 나와 같은 인간이었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만이라도 가져보자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내 안의 나락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이 남는다.

질투가 올라올 때, 갑자기 누군가를 통째로 부정하고 싶어질 때, AI나 시스템 뒤로 숨어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질 때, 그때 “아, 지금 내 안의 나락이 꿈틀거리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 알아차림으로는 세상을 바꾸진 못한다. 이누야샤나 셋쇼마루처럼 나락을 한 번에 쫓아내지는 못한다. 하지만 나의 선택은 결과를 바꿀수 있다. 

그건 운명을 바꾸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선택이 누적될 때 비로소 하나의 “나”라는 서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여기서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락처럼 결핍으로부터 도망치려 하는 존재이기도 하고, 셋쇼마루처럼 집착을 내려놓고 자기 길을 찾아가는 존재이기도 하고, 오이디푸스처럼 자신의 운명 앞에서 비극적으로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모습을 자기 안에 동시에 품고도, 끝까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기를 멈추지 않는 존재다.

 

AI는 정답처럼 보이는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을 품은 채 끝까지 흔들리고, 정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자리, 그 자리는 아직 인간에게 남아 있다.

나는 지금, 나락과 테세우스의 배와 AI를 통과해 돌아와 다시 “인간”이라는 낱말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란,

자기 삶을 향해 “이게 무엇이었지?”라고 되묻고, 그 질문에 답하려 애쓰며, 틀리고, 다시 쓰고, 또 고치면서 조금씩 자신의 의미를 지어가는 존재가 아닐까?

그때 비로소, 인간이란 “의미를 짓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이누야샤>를 통한 사유의 여정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By Dharma & Ma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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