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2025년 11월 18일
제목:<위대한 개츠비> 를 통해서 읽는 세상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 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의 심층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존재였다. 작가가 ‘제이 개츠비’를 “위대한”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그가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열망이 너무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사랑을 얻고 싶었고, 과거를 되찾고 싶었고,그 욕망을 위해 현실을 재창조했다.
하지만 그 위대하고 순수한 욕망은 부패한 구조에서 출발하였다.
결국엔 그의 꿈은 환영과도 같았고, 그의 낭만은 범죄로 변하고 말았다.
개츠비의 비극은 욕망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걸 실현하는 시스템이 썩은 것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제프리 엡스타인’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는 실존 인물로 1990년에서 2000년대에 걸쳐 그의 집, 섬, 전용기에서 개츠비와 같이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전 미국 대통령(클린턴),현 미국 대통령(트럼프), 영국 앤드류 왕자를 비롯한 정치계 거물과 하버드, MIT등의 학계, 그리고 CIA ,그룹의 CEO, 연예인 등 전세계 엘리트들이 드나든 기록이 폭로 되었다.
이 화려한 네트워크 뒤에는 정말 묘하게도 제이 개츠비가 연상된다.
개츠비는 허구였지만 엡스타인은 그 허구가 사실이였음을 증명해버린 실존인물인 것이다.
엡스타인은 개츠비가 미처 도달하지 못한 영역을 완성한 셈이다.
그는 대통령, 왕실,과학자, 헤지펀드, CIA 같은 인맥을 넘나들며 세계 각층의 엘리트들의 비밀을 수집하고 관리하는 정보 브로커였다.
그리고 그는 미성년 소녀들을 이용한 성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 2019년, 두번째 복역 중인 교도소에서 엡스타인은 석연치 않은 자살로 생을 마쳤다. 그는 게츠비의 ‘위대함’을 넘어선 ‘위험함’으로 진화한 악의 최종 보스로 끝나버렸다.
하지만 죽은 그의 망령이 비트코인 시장을 흔들고 있다.
비트코인, 현재 오늘의 시세로 1개의 비트코인은 약 89,700 달러이다. 한화로 약 1억 3천만원. 불과 한달 전만해도 1억 7천만원대 였었다.
비트코인 하락의 이면에는 흥미롭게도 죽은 엡스타인이 관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비트코인은 원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한 천재적인 인물에 의해 탄생 되었다. 블록 체인이라는 기술을 이용한 중앙은행에서 벗어난 화폐 방식으로 기존 달러 시스템을 뒤 흔들어 버렸다.
비트코인 창시자 사토시 나카모토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다.
현재 지구상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그가 만든 비트코인은 현재 국가와 은행 그리고 권력을 우회하는 시스템 알고리즘을 지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비트코인에 열광했던 이유가 기존 금융 카르텔이 통제하는 화폐가 아닌 탈중앙화된 자유 화폐를 추구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바램과는 달리 현실은 정반대였다.
비트코인을 가장 먼저 사들인 사람은 다수의 서민들이 아닌 월가의 자본이었다. 가장 큰 수익 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돈 없는 대중이 아닌 돈 굴리는 헤지펀드였다. 지금 비트코인을 ETF로 관리하는 것은 반체제가 아닌 블랙록이다.
그렇다면 이제 사토시는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화폐 실험도 결국 금융 엘리트 카르텔에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최근 미국 하원에서 공개된 죽은 엡스타인의 이메일에서는 비트코인 코어 개발자에게 엡스타인의 자금이 개발에 지원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저택에서는 비트코인 관련 논의가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이것은 비트코인이라는 혁명적인 서사를 깨뜨리는 것이며 코인 시장의 판을 설계 하는데 금융 카르텔이 관여했다는 말이 된다.
죽은 엡스타인이 살아있는 코인 시장을 뒤 흔들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그의 망령이 코인 뿐만 아니라 권력과 욕망의 세계를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개츠비, 앱스타인, 사토시의 공통된 진실은 개인의 욕망이 권력에 의해 실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권력의 구조 이야기를 음모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의 핵심은 음모론이 아니라 구조를 읽어내자는 것이다.
그림자 정부라는 게 실제 있는 없든, 권력은 항상 은밀하게, 부는 언제나 중앙에서 흡수를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구조가 이미 작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누구이든, 우리는 이미 그 구조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생존 방식은 장님이 되지 않고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사토시는 카르텔의 일원일 수도 있고 카르텔에 저항한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엡스타인은 권력 카르텔의 시스템의 관리자였을 수도 있고 희생된 바지 사장이었을 수도 있다. 위대한 개츠비는 실패했지만 그가 보여주려 했던 꿈의 본질은 아직도 유효하다.
정말로 위대한 것이란 무엇인가?
지금의 시대는 단 한 명이라도 더 세상을 정확히 보려고 하는 깨어있고자 하는 사람일 것이다. 단지 눈만 제대로 뜨자.
그것이 위대함의 출발이 아닐까?

by Dharma & Mah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