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4월3일
오늘의정진: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 100일 정진, 99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스물 다섯 번째와
백 스물 여섯 번째 구절은
<粉骨碎身未足酬/분골쇄신미족수/뼈가 가루 되고 몸이 부셔져도 다 갚을
수 없나니
一句了然超百億/일구료언초백억/한마디에 요연히 백억 법문 뛰어넘도다
法中王最高勝/법중왕최고승/법 가운데 왕 가장 높고 수승함이여
河沙如來同共證/하사여래동공증/강 모래 같은 많은 여래가 함께 증득 했도다> 였다.
법화경에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고 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하는 일화가 있다. 어느 부자가 사는 집에 크게 불이 났다. 때마침
아버지는 집 밖에 있어 위기를 벗어 났으나 그 집의 아이들이 아직 집 안에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집 안에서 신나게 놀고 있느라 집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급한 아버지는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나오게 하고자 꾀를 내어 아이들이 놀고 있는 집안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여기 양이 끄는
마차, 사슴이 끄는 마차, 소가 끄는 마차가 있는데 이걸
너희들에게 주겠다." 그러자 아이들은 수레를 얻고자 얼른 집에서 뛰어나왔다. 아버지는 기쁜 나머지 실제로 하얀 소가 이끄는 마차를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 비유에는 아버지가 자식들을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해 방편(方便)을 썼듯이 부처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방편을 쓴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법화경에서 부처의 방편은 본질적인 진리를 얻기 위한 수단이지만
또한 진실이기도 하다. 사람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사용되는 방편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래는 지금껏 수많은 방편으로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여래의 은혜가 어찌 크지 않을 수 있는가?
오늘은 백 스물 일곱 번째와 백 스물 여덟 번째 구절
我今解此如意珠/아금해차여의주/내 이제 이 여의주를 해설 하오니
信受之者皆相應/신수지차개상응/믿고 받는 이 모두 상응하리로다
了了見無一物/료료견무일물/밝고 밝게 보면 한 물건도 없음이여
亦無人兮亦無佛/역무인혜역무불/사람도 없고 부처도 없도다.
‘내 여의주’란 나의 근본 마음을 뜻한다. 믿는 다는 것은 나의 근본 마음, 즉 '참 나'를 믿는 것이다.
근본 마음은 본래 밝아 있지만 들여다보면 본래 한 물건도 없다고
한다. 무일물(無一物)이란
내가 없음을 말한다. 내가 없으니 상대도 없다는 뜻이다. 중생이
있으니 부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없으면 부처도 없게 된다. 그런데 무아(無我)라고 하면 '내가 없음'
이라고 하지만 여기서의 '나, 아(我)'는 '고정된 나'를
말한다. 따라서 무아는 ‘고정된 나 라는 상(相)이 없다’는 뜻이다. 어떤 분들은 무아와 참 나의 모순됨을 설명하려는 분들이 계시던데 그럴 필요가 없다. 무아와 참나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자 해석에 치우치면 둘의 관계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뜻으로 보면 무아가 곧 참 나임을 알게 된다. 내 주인공
참 나는 여의주와 같고, 나는 본래 고정되지 않으니 무아인 것이다.
<일일 소견>
어제 저녁 설겆이를 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묵묵히' 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묵묵히
라는 말에 하나하나 쌓아가는 축적의 힘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들뜨지 않고, 초조 하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내가 하는 것은 그대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축적이 되는 거였다. 마음 하나, 행동 하나 ‘묵묵히’ 행 할 때 바로 내공이 쌓이는 중이라는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