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5년3월25일
오늘의정진: 從來層磴覺虛行/ 종래층등각허행/예전에 비틀거리며 헛된 수행 하였음을 깨달으니
- 100일 정진, 90일차
어제 증도가(證道歌) 백 일곱 번째와 백 여덟
번째 구절은
<分別名相不知休/ 분별명상부지휴/이름과 모양 분별함을 쉴 줄 모르고
入海算沙徒自困/입해산사도자곤/바닷 속 모래 헤아리듯 헛되이 스스로 피곤하였다
却被如來苦呵責/각피여래고가책/문득 여래의 호된 꾸지람 들으니
數他珍寶有何益/수타진보유하익/남의 보배 세어서 무슨 이익 있을 건가> 였다.
부처님 당시 불교는 교종(敎宗)이나 선종(禪宗)이란 구분이 없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경전으로 옮기는 과정중에 교종이 탄생했다. 그리고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는
가운데서 선종이 탄생했다. 교종과 선종은 본래 둘이 아니다. 두
가지 모두 붓다가 깨달았던 경지로 이끄는 훌륭한 가르침이다.
달마대사가 중국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불법은 중국에 전해져 있었다. 또한 구마라습(334~413) 같은 불세출의 고승에 의해 인도의 경전들이 한문으로 번역되어 대장경이 되었다. 대장경을 배우고 선을 수행하는 수행자들에 의해 점차 중국불교는 교종과 선종을 구분하기 시작했고 또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스승에 따라 서로 다른 종파와 문중(門中)으로 나누어지며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영가현각 (永嘉玄覺 665~713)스님이 출가했던 절강성 지역은 본래 천태종의 발상지였다. 천태종은
선종이 탄생하기 전쯤에 생긴 종파라 사실상 교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영가스님도 출가 후
당시에 번역된 경전들을 통해 불법을 배웠으리라 추측해 본다. 그러나 불법을 배우는데 교종이든 선종이든
가는 길은 다를지언정 길의 목적지는 분명하다. 수행의 길은 한 가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 까지는 헤메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를 이끌어 주는 스승님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은 백 아홉 번째와 백 열 번째 구절
從來層磴覺虛行/ 종래층등각허행/예전에 비틀거리며 헛된 수행 하였음을
깨달으니
多年枉作風塵客/다년왕작풍진객/여러해를 잘못 풍진객 노릇 하였구나
種性仕邪錯知解/종성사착지해/성품에 삿됨을 심고 알음알이 그릇됨이니
不達如來圓頓制/부달여래원돈제/여래의 원돈제를 통달치 못함이로다.
수많은 경전을 읽고 경전속의 가르침을
실천을 한다고 해도 스승이 없다면 자신이 수행하는 길에 대한 확신이 서기 어렵다. 웬만한 신심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믿는 바를 제대로 내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며 자칫 잘못하면 잘못된 길로 빠져들면 다시 빠져나오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행이 올바른 지에 대한 회의가 들수록 눈 밝은 스승에게 점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영가스님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여러해 동안 자신의 수행이
헛된 수행을 했음을 알게 되고 본래 참성품을 알지 못하고 그저 알음알이의 사견에 빠졌다고 했다. 수행자의
진솔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는다.
법화경의 핵심은 일체 모든 중생은 성불할 수 있다는 수기(授記)를 내린 사건이다. 사실상 부처님께서 설했던 모든 8만4천 법문의 결론은 성불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 마다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를 못한다.
여래의 경지에 단박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일 소견>
믿음은 믿어야지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저절로 믿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