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노트> 무조건 좋게 결정지어서 맡겨놓기
날짜:2024년 12월26일
오늘의정진: 증도가(證道歌) 첫 구절, 君不見 그대 보이지 않는가
u 100일 정진, 1 일차
어제 발심을 했고 오늘 정진 1일차 들어간다.
증도가(證道歌)를 지은 영가(永嘉)스님(674~713)은 중국 당(唐)나라 시기에 살으셨던 분이다. 당시의 중국 불교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의 등장으로 선(禪)불교가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기존에 교학(敎學)을 중심으로 하던 수행방식을 완전히 전복 시킨 혁명과도 같은 수행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돈오(頓悟), 즉 단박에 깨닫는다 것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불교 수행이었다.
부처님 열반 이후 불법은 인도에서 28대조인 달마대사로 부터 중국에 전해졌다.
선불교에서는 달마대사를 선의 초조(初祖) 즉, 1대 조사로 삼는다.
그 핵심은 "불입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入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 이라 할 수있다.
직지인심, 곧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킨다. 마음을 깨치는 것이 부처라고 했다.
부처님 말씀을 경전을 통해 공부하여 부처와 같은 경지로 가는 것에서 경전을 통하지 않고 곧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선(禪)' 이다.
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바로 부처와 같은 경지, 즉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 선불교가 번성하게 된 이유이다.
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로 나눠지는데 우리나라에는 성철 스님이 한때 논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었다.
돈오와 점수는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1158~1210)에 의해 이미 정리가 되었다.
증도가는 '도(道)를 증득(證得)한 노래(歌)' 로 풀이할 수 있다.
증도가를 지은 영가스님은 혜능대사에게서 깨달음의 인가(認可)를 받으신 스님으로 혜능대사 문하에서 직접 수행지도를 받으신 분은 아니라 한다.
혜능대사를 뵙기 전에 이미 스님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고 그에 대한 인가를 혜능선사에게 받은 것이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렀어도 자신의 깨달은 바가 맞는지 검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거짓 깨달음에 빠질 수도 있고, 깨달았다고 착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식(善知識)을 찾아야 한다.
영가 스님이 조계산(曹溪山)에 계신 혜능 스님을 찾아 뵙고 선문답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를 받게 된다. 인가를 마친 영가스님은 곧 바로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혜능 스님은 영가스님을 하루 밤만 더 머물다 가라고 하셨다.
그래서 영가스님을 '일숙각(一宿覺: 하룻 밤의 깨달음)' 이란 별칭을 가지게 된다.
두 분 스님은 현세에서 단 하루 뿐인 인연이었지만 세세생생 함께 이어지게 된다.
공교롭게도 두 분이 713년, 모두 같은 해에 이 세상을 떠나셨다.
증도가의 첫 구절, 君不見(임금 군, 아닐 불, 볼 견) 군불견 으로 시작한다.
뜻은 통상적으로 君군을 '그대' 라는 뜻으로 보고 <그대 보지 못하였는가> 혹은 <그대 못 보았는가> 로 해석한다. 성철 스님도 그렇게 해석하셨다.
그런데 나는 좀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그대 보이지 않는가>
이것은 전혀 다른 뜻으로 분명 차이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다는 뜻의 한자는 看, 見, 觀 (간, 견, 관) 이 있다.
얼핏 같은 뜻인 것 같지만 사용되는 면에서 각각 차이가 있다.
중국어로 "看不见" (kan
bu jian: 칸 부 지엔) 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를 분석해서 보면 이 뜻은 사실은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 는 뜻이 된다.
우리말로는 '看간'과 '見견'은 전부 '보다' 는 뜻으로 쓸 수 있지만 앞의 간은 볼려고 하는 의도가 들어가 있다.
즉 앞의 看간은 볼려고 시도하는 의지가 있는 능동적이고 , 뒤의 見견은 '보여지는' 약간의 수동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견은 보려고 하는 의지가 아닌 자연스레 혹은 저절로 보여지는 상태인 것이다.
뉘앙스가 서로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見(견) 은 '보려는 의지' 가 아닌 '보여지는 상태'로 이해 해야 한다.
팔정도(八正道)로 유명한 正見(정견)은 '바르게 보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바르게 보여지다> 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깨달음의 단계에 해당하는 '견성(見性)'은 <성품을 보다> 가 아니라 <성품이 보여지는> 으로 이해 해야 뜻이 부합된다.
깨달음은 의지로 이루어 지는게 아니다. 성품을 볼려는 의지로 보아지는게 아니란 것이다. 깨달음이 와야한다. 성품이 보여져야 한다. 즉 능동이 아닌 수동이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에서 인연은 억지로 맺는게 아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되어져야 한다. 성품은 보여지는 것이다. 내가 본다고 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라는 경지에 다달아야지 저절로 보여지는 경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증도가 첫 구절, 君不見(군불견) 은 <결국 그대 보지 못하는가>
보다는 <그대 보이지 아니한가>로 이해해야 한다.
증도가는 영가스님의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한 글이다.
그러니 '그대'로 지칭하는 '나' 는 아직 그 경지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보여지는 경지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문득 보여지는 경지.
그대 아직 보이지 아니한가.
마지막으로 觀(관) 은 '看간'과 '見견'을 모두 합친 상태의 '보다'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관은 유위법(有爲法) 적인 대상과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무위법(無爲法)에 해당하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는 것을 뜻한다.
즉,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본다' 고 할 때는 觀(관) 으로 써야 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뜻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보는 보살이라고 했다.
소리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그러니 무위법이다.
내면을 관한다. 이것도 역시 무위법이다. 보는 대상을 눈으로 보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 나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