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제목: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지은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제 목: 그래서 아버지를 용서 하실 건가요?
마힐: 안녕하세요. 마힐입니다. 얼마전에 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완독했습니다. 러시아 장편 소설은 처음이라 읽기전에 은근히 내심 걱정했어요.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 거의 대부분은 작가나 제목은 아주 유명하지만 읽어볼 엄두가 솔직히 잘 안 나거든요. 읽어 보기도 전에 그 압도적인 양때문에 포기 하게 되 더라구요. 제가 살면서 그랬거든요.
그래도 늘그막에 독서를 시작 했으면 반드시 고전은 넘어야 할 산이라 생각해서 이번에 큰 맘먹고 이 책<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골랐죠. 그렇게 알라딘에서 고르고 고르다가 <코너스톤> 출판사의 2권짜리 양장본으로 구매해서 정독을 했어요.
정독 후 느낌이 어땠냐 구요?
아, 이거 정말 읽어 볼만 하다는 겁니다.
페이지로 따지면 1500페이지가 넘어 부담을 가졌는데 막상 읽기 시작하니까 진도가 쭉쭉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용이 생각보다 무척 흥미진진 하더라구요.
일단 등장 캐릭터들 간의 입체적 완성도와 종교, 특히 기독교적 인 사고와 무신론적인 사고의 대립, 마지막 법정 공방까지 긴장감이 팽팽하게 이어지더라구요.
오늘은 그래서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 중 한 명을 불러내 인터뷰 형식으로 리뷰를 진행 하면 어떨까 합니다.
책에 대한 리뷰를 하기전에 쓸데없는 저의 서론이 길었는데요. (대기하고 있는 사람을 향하며)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자기 소개 좀 부탁 합니다.
이반: 안녕하세요. 저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둘째 아들 이반 표도르비치 입니다. 카라마조프는 성(姓)이고 이름은 이반 표도르비치 인데 편하게 이반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런데 사회자님은 작가가 소설속의 주인공으로 설정한 내 동생 알렉세이 표도르비치를 놔두고 인터뷰이(Interviewee)로 왜 절 선택했나요?
마힐: 아, 그건. 당신이 카라마조프가의 남자들 중 가장 이성적이기 때문에 선택했어요.
이반, 당신도 알다시피 의 당신 아버지 표도르는 인터뷰이로 하기엔 제가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도무지 컨트롤이 안되잖아요. 조시마 장로를 만나는 경건한 수도원에서 조차 생난리 굿을 피웠잖아요? 아시죠?
이반: 네, (피식 웃음) 카라마조프 다운 행동거지 였었죠.
마힐: 그리고 큰 형 드리트리는 앞뒤 따지지 않는 감정과 행동 때문에 그 역시 컨트롤이 안되고요. 막내 알렉세이는 또 너무 순수해서 아니 신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서 인터뷰를 하게 되면 설교를 듣게 될 것 같아요. 그래도 형제들 중 이반 당신이 가장 이성적 이잖아요? 그래도 저는 카라마조프가의 사람들 모두가 진주인공이라 생각돼요.
이반: (정색을 하며) 방금 저를 이성적이라고 했지만 저도 형의 재판에서 끝내 이성을 놓아 버리고 거의 반 미쳐 버리지 않았나요? 아뇨. 전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어요. 제 아버지도 그렇고 큰형과 저, 막내 모두 카라마조프적인 기운을 가졌기 때문이에요.
마힐: 카라마조프적 기운요? 책에서도 수 없이 언급 되어지는 ‘카라마조프적 힘’이나 ‘카라마조프식의 방법’ 같은 표현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도대체 ‘카마라조프적(的)’ 이라는 불리는 힘의 상징이나 정체성이 무엇 인가요?
이반: 음.... ‘카라마조프라적(的)’ 하면 한마디로 규정 할 수 없어요.
그건 소설을 쓴 도스토옙스키((1821~1881) 작가를 불러서 물어봐야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카라마조프적이라 함은 우리 집안 남자들의 특성을 모두 포함한 것이라고 봐요.
마힐: 카르마조프 집안 남자들의 특성요?
이반: 네, 제 아버지 표도르는 거의 짐승에 가까운 성욕과 본능대로 일생을 살았잖아요.
형 드미트리는 정말로 순수한 사람이지만 격정적인 감정에 끌려 일생을 살았고요.
저는 무신론자이면서 이성(理性)을 앞세워 세상을 파악해 왔죠.
또 제 친동생 알렉세이는 신성(神性) 한 삶을 살고자 했잖아요.
그리고 어쩌면 나의 또 다른 동생일지도 모를, 아버지의 사생아 스메르탸코프는 이성과 감정을 모두 비틀린 채로 삶을 살았었죠. 이렇게 우리 카라마조프가의 남자들의 서로 다른 가치관들을 모두 하나로 섞여서 내는 기운이자 힘이라고 생각 합니다.
마힐: 저 한테는 마치 선과 악, 미(美)와 추(醜),속(俗)과 성(聖)등 저열함과 고결함 같은 서로 반대 되는 모순적 특성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라고 들리는 데요. 맞나요?
이반: 제가 작품속의 등장인물 하나에 불과 하지만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작가의 뜻은 그게 아닐까 싶어요. 책의 첫 시작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 복음 12장 24절)
마힐님은 죽어야 산다는 말 들어 본적이 있나요?
마힐: 네, 들어 본 적이 있어요. 죽음을 각오 할 정도로 어떠한 희생을 한다면 결국 결과는 육신이 죽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혼이나 본래 가진 성품이 되 살아난다는 뜻이 아닌가요?
이반: 구체적으로 작품속의 사건들을 통해 예를 들면요?
마힐: 네 , 작품속에서는 많은 사건들이 있잖아요. 그 중에 저는 막장 드라마 같은 설정과 기독교적 인 정서를 서로 적절하게 소통을 시도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작품의 큰 사건엔 아버지와 큰 아들이 그루센카라는 여자를 두고 대놓고 싸우는 치정(癡情)과 큰 형의 약혼자 카테리나와 시동생 뻘인 당신, 이반과의 사랑과 같은 세속적 설정이 큰 틀이 되죠. 그리고 그 안에는 조시마 장로가 깨달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과 구원 같은 종교적인 설정도 함께 진행되죠.
그런데 작품에서는 세속의 저열한 것이든 종교의 고결한 것이든 모두 하나로 귀결 시키고 있어요.
한 알의 밀이라는 뜻은 작품속에서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을 말하는 것 같아요.
이반: 그럼 한 사람의 숭고한 희생이라면 누굴 말하나요? 제 동생 알렉세이를 말하나요?
마힐: 네 , 저는 당신의 동생 알료샤(알릭세이의 애칭)가 인물들간에 벌어지는 갈등과 대립을 하나로 연결 시켜주는 역할을 했다고 보았거든요. 저속한 아버지의 성품, 격정적인 성품을 지닌 큰형 미탸(드미트리의 애칭)와 그리고 이반 당신의 무신론자적인 이성(理性) 등을 모두 한마음으로 품었다고 봐요.
이반: 맞아요. 알료샤도 육체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카라마조프가(家)의 피가 흐르지만 그 아이의 정신적 아버지는 스승이신 조시마 장로라고 봐 야죠.
조시마장로가 세상을 떠나며 알료샤에게 전한 말이 있죠.
"나는 양파 한 뿌리를 주어서 여기 있는 것 이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도 양파 한 뿌리를, 그저 자그마한 양파 한 뿌리를 주었을 뿐이지...
너도 오늘 구원을 갈구하는 여인에게 양파 한 뿌리를 주었 더구나" P.78
양파 한 뿌리는 구원을 상징하죠.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하잖아요.
즉 여기서 구원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원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힐: 아, 저는 양파 한 뿌리 일화를 읽으면서 얼마전에 읽었던 라쇼몽의 작가 이쿠타가와 이노스케의 <거미줄> 이란 단편에 나오는 설정이 너무나 똑 같아서 놀랐어요.
아마도 이노스케가 도스토옙스키의 양파 한 뿌리 설정을 차용한 게 아닌가 싶어요. (도스토옙스키가 더 앞선 시대 였으니까요.)
아무튼 기독교적 인 구원은 불교 수행하고도 비슷한 것 같아요.
기독교의 구원은 부활하고 연결이 되거든요. 즉 기독교의 부활은 불교의 깨달음과 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이반: 네, 나의 창조자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소설에서도 일관되게 구원에 대한 성찰을 말하고 있다고 봐요. (<죄와 벌>을 읽어 보세요) 죄를 지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에 대한 작가적 화두가 작가의 작품들 속에 투영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번 작품속에서는 저는 이성을 대표하는 인간으로 나오죠. 제가 지은 <대심문관> 이야기를 보면 대심문관과 그리스도의 갈등 나오잖아요. 전 이것이 이번 작품의 작가적 화두에 대한 답이라 고 생각했어요.
마힐: 맞아요. 저도 당신의 이성주의로 풀어낸 대심문관 일화가 흥미로웠거든요.
마지막 대심문관의 소란스런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언(無言)의 입맞춤에서 저는 처음엔 뭔가 작가의 화해적 제스추어가 아닌가 생각 했어요.
이반: 그렇죠. 저도 그런 의미 심장한 뜻으로 알료샤에게 전달 했지요.
마힐: 그런데 저는 그 침묵의 입맞춤에서 뭔가 더 중요한 의미가 담겼다고 봤어요.
그건 바로 '용서'가 아니 였을까 싶어요.
이반: 용서요?
마힐: 네. 작가의 60평생중 가장 마지막으로 낸 작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잖아요. 제가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 보지 않았지만 (<죄와 벌>은 도전해 볼 께요) 이 마지막 작품에는 아무래도 작가적 역량을 총 집결 시키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품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입체적으로 너무 완벽했어요. 어느 것 하나 개연성 없거나 부족한 캐릭터는 전혀 없어요. (그래서 대문호라고 부르는 거겠죠.)
전체 스토리를 보면 요. 소설의 전반부는 아버지와 아들의 치정에서 출발한 사건들과 조시마 장로의 죽음이 주를 이루었어요. 후반부로 가면 아버지의 죽음과 3000루블의 행방을 두고 형 미탸의 법정에서 진실 공방이 나오잖아요.
이반: 아시다시피 작품속에서 모든 사건의 전개 속도가 굉장히 빨라요. 아버지와의 갈등, 형과 카테리나와 갈등, 조시마 장로의 죽음, 형 미탸의 구타사건 과 아버지의 죽음에 이르기 까지의 모든 사건들이 시간적으로 3일안에 벌어지는 일이죠. 후반부에 형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나와 스메르탸코프와의 진실 갈등, 법정 공방까지도 불과 하루 이틀 안에 끝나버리죠. 이러한 모든 갈등이 용서로 귀결 된다는 건가요?
마힐: 네, 작품 초반부에 아버지와 미탸의 갈등을 풀어보고자 조시마 장로가 마련한 수도원 수행처에서 모두 한자리 하잖아요. 그때 조시마 장로가 미탸의 불안정한 기운을 읽고 서는 무릎을 꿇고 미타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잖아요. 그때 다들 그게 무슨 의미 인지 모르잖아요. 미타에게 닥칠 불운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용서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고 봐요.
일료샤의 아버지를 두들겨 팬 미탸에 대한 용서, 그리고 얄료샤를 깨물어 버린 일료샤에 대한 용서, 그리고 병든 일료샤에게 용서를 구하는 콜라, 그리고 그루센카 또한 마지막에 미탸에게 용서를 구하잖아요. 카테리나 또한 미탸에게 용서를 구하고요.
각 인물들 간의 갈등은 용서를 통해 해소가 돼요.
이반: 아,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그렇기도 하네요. 제 관점에선 미타형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 같았어요. 난 앞뒤없이 나가는 형을 이용했죠. 그 과보를 나중에 받았지만 말이죠.
마힐: 그 과보라는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당신도, 형도, 아버지도, 글루센카도, 카테리나도, 심지어 스메르탸코프 까지 모두가 자업자득이었다고 봐요.
하지만 조시마 장로는 알료샤에게 이미 이런 얘길 했었죠.
“진심으로 뉘우치는 데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지 않으실 만큼 큰 죄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존재 할 수도 없다.”
이반: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용서 못하 실 죄는 없다는 것인가요?
마힐: 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속에서 전하는 주제는 용서라고 보는 겁니다.
하느님이 죄를 지은 인간에 대한 용서 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 간의 용서도 포함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 아버지에 대한 용서가 가장 큰 용서가 아닐까 싶어요.
제가 볼 때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당신이나 형 미타는 아버지를 용서해 주실 수 있나요? (알료샤는 이미 다른 차원 사람이니까 그 용서함에서는 벗어 났다고 봐요. )
이반: 아….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후 우리를 방치 했어요. 우리의 존재 자체를 인정 조차 하지 않은 사람을 아버지라 할 수 있을까요? 표도르 그는 아버지란 호칭도 부를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미타 형과 저는 어릴 때 받은 상처를 평생 가지고 살아야 했는데 이게 다 아버지 탓이 아니고 누구 때문인가요? 그런 아버지를 용서 하라구요?
나와 형은 하느님이 아니에요. 인간인 이상 누구를 미워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나요?
마힐: (침묵) …. 네… 성숙한 자식들의 미숙한 아버지. 그 인간 표도르를 아버지 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 보자구요. 인간 같지 않은 짐승적 본성과 성욕이 지배하는 남자. 카르마조프 집안의 우두머리, 그를 악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아니죠? 다만 당신 형제들에게 무책임한 가장이었을 뿐이고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인간 수준으로 바라 보자구요.
존경은 못하겠지만 그런 미숙한 인간에게 용서는 해줄 수 있지 않나요?
당신 형제들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겠지만 그 억하심정을 평생 가슴에 담아 두실 겁니까? 용서는 하느님만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아닌 한 인간이 인간을 용서 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이반:…. 나는 모르겠어요. 또 미타 형은 어떻게 생각할 지… 나는 모르겠네요…
하지만 용서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겠어요.
마힐: 사실, 저는요. 용서에 대해 기독교적 표현 보다 불교적 표현으로 말씀 드리고 싶어요.
선불교에서는 죄는 없다고 해요. 내가 없는데 죄가 어디 있고,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가 있냐고 하거든요. 근본 자리에서는 모두가 평등한데 누가 누구를 용서하느냐는 거죠.
이것은 이해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쉽진 않지만 한 순간에 돌려 녹여라 하거든요.
이반: 용서는 없다라. 돌려 녹여라. 음… 나는 오히려 이 표현이 더 맘에 드는데요. 무조건 적인 용서를 강요하는 것 보다 차라리 용서는 없다가 저 한테는 더 맞는 것 같네요.
마힐: 하하하…. 이번 리뷰 인터뷰는 역할이 바뀌어 버렸어요. 제가 묻고 이반씨가 답해야 하는데. 오히려 제 주장만 하는 꼴이 되어 버렸네요.
전체 줄거리는 건너뛰고 제가 느낀 것 위주로 했기 때문에 리뷰만 봐서는 줄거리 이해가 쉽지 않겠어요. 그래도 저는 이반씨 하고 공감한 걸로 만족 하겠습니다.
이반: 그러게요. 사실 저보다 드미트리 형의 관점과 알료샤 관점에서 보는 리뷰도 좋았을 것 같은데요.
마힐: 아닙니다. 전 이대로 마무리 할 려구요, 참, 사족이지만 미탸가 집착했던 3천 루블이 오늘날 시세로 보면 얼만지 아세요? 제가 계산해 보니 한화로 약 1억 3천 4백만원 되더라구요. 계산 방식은 별도로 올릴 께요. 그럼 길었던 리뷰는 여기서 마칠께요. 이반 안녕~ (이반 사라진다)
p.s: 그 당시(19세기) 1루블 은(银) 28g값이라네요. 3천 루블이면 (28*3000/1000= 84) 84KG나 되는 은 값이 되는 거죠. 1KG 은을 현재 시세로 바꾸면 160만원 정도 한다네요) 그래서 84키로*160만원= 약 1억 3천 4백 만원이 됩니다. (은 값은 시세에 따라 달라지니 대략 감만 잡는 걸로...)
결론: 지금 3천 루블은 한화로 약 4만원 정도, 그러나 19세기의 3000루블은 1억 상당의 거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