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깟 댓글?!
국정원 댓글조작사건이 처음 보도되었을 때 들었던 생각(또는 의문)은 두 가지였다. 댓글을 소수가 조작한다고 다수의 여론을 흔들거나 유리한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을까? 나라를 대표하는 정보기관에서 그깟 댓글 따위에 관여를 할까? 사건의 후속보도와 실제로 여러 사례에서 여론을 움직이는 ‘그깟 댓글’의 힘을 보면서 뒤늦게 그 위력을 알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댓글은 ‘그깟’으로 느껴졌다. 쏟아지는 기사의 홍수 속에 개인이 달 수 있는 댓글이야 네이버의 경우 하루에 20개가 고작이고 아무리 많은 계정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봐야 소수다. 그러니 양적인 면에서 본다면 다수의 흐름과 다른 댓글들은 그야말로 소수의견일 뿐이다. 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다른 의견의 댓글을 아무리 논리적으로 풀어서 단다고 하더라도 수에 밀리면 묻히기 십상이다. 이게 상식적이다. 그런데 이 작품 ‘댓글부대’는 소수의 의견(또는 논란)으로 다수의 흐름과 응집력을 깨버리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논리로 부수는 게 아니라 자중지란을 일으키는 거다. 말하자면 ‘공작 댓글’인 건데, 이를테면 집단 내의 영향력 있는 표적 몇 개를 선택해 집중적으로 건드려 의도를 의심하게 만들거나, 털어서 나온 먼지 몇 개를 부풀려 키우거나, 문제의 핵심과는 다른 감정적인 부분으로 몰아가 본질을 흐려버리거나, 센 척하다 유리한 증거물만 모은 후 갑자기 법대로 하자며 피해자 코스프레로 변신한다. 명백한 선동과 날조다. 그러니까 소수의 댓글이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상식적인 논리가 아닌 ‘선동이거나 날조’여야 한다는 거다. 그렇지 않은 상식적인 논리의 댓글은 ‘그깟’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재밌게 읽은 건, ‘댓글’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소재이면서도 위의 예처럼 잘 몰랐던 이면(혹은 위력)을 빠른 호흡으로 개연성 있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불편하게 읽은 건,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 ‘어차피 대중들은 개, 돼지... 적당히 짖어대다 알아서 조용해질 것’이라는 시선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기 때문이고 말이다. 즉, 아무리 떠들어봐야 괴벨스의 말처럼, ‘대중에게는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생각이라는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한 말을 그대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언제든 선동과 날조로 휘두를 수 있는 생각 없는 존재, 의미 없이 짖어대는 개돼지란 의미에서의 ‘대중’이란 집단에 내가 강제적(또는 잠재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모멸감이 들어서다. 난 누군가의 ‘그깟 댓글’에 휘둘리다 알아서 조용해지고 쪼그라드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에 강제로 부끄러움을 당한 느낌이 들어서다. 그리고 무섭게 읽은 건, 이런 선동과 날조의 공작 댓글이 주로 사용하는 ‘분노와 증오’의 힘을 현실세계에서 지금 보고 있기 때문이다. 작게는 내가 가입한 커뮤니티에서, 크게는 세계를 움직이는 미국이란 나라의 공화당 대선주자 ‘트럼프’가 그렇다. 내가 가입한 커뮤니티의 회원들이 가끔씩 싸우는 모습을 보면 ‘뭘 그런 걸 가지고...’란 생각으로 끝나지만,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는 상상을 해보면 그가 주로 사용하는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한 ’선동과 날조‘의 위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다시 한 번 목격하는 게 아닌가.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말 하려는 바를 풀어내는 형식이 소설이다.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댓글을 조작해 여론을 선동날조하거나 집단을 부수는 팀-알렙이란 세 명의 청년이지만, 작가는 이들을 통해 말 하려는 바를 드러내지 않는다. 작품은 그저 개연성이 충분한 핍진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주기만 한다. 즉 말하는 소설이 아니라 보여주는 소설이란 거다. 주인공의 말과 행동으로 주제를 풀어나가는 게 아니라 주인공은 화자로서만 존재하고 소비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이 이야기를 경험하는 독자라는 거고, 주제는 ‘댓글’이란 소재를 통해 개개인의 독자가 실제로 경험한 무한대의 이야기다. 작게는 개인에서 크게는 가장 영향력 있는 집단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과거를 되짚거나 현재진행중이거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가능성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소설이 재미와 불편을 넘어 무섭게 다가오는 건 그러한 이야기의 확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일개 댓글이 ‘그깟’이 아닌 ‘분노와 증오’를 바탕으로 하는 ‘선동과 날조의 댓글’로 기능할 때의 파괴력. 작품에서는 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여줄 뿐 실제로 떨어졌을 때의 파괴력과 영향력을 미시적으로 보여주는 선에서 끝낸다. 그것이 미칠 파급효과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상상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아니면 진정한 공포는 터졌을 때가 아닌 만들어가거나 갖고 있을 때라는 걸 보여주려는 것일 수도 있다. 바로 내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고 있거나 벌어질 가능성이 있는 작은 이야기의 환경이 작은 불씨가 되어 손을 쓸 수 없을 정도의 산불로 번질 수도 있다는 확장의 가능성과 파괴력. 일개 댓글이 마냥 ‘그깟’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 주인공이 나, 내 옆의 누군가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 작품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