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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이름
내일의커피  2014/11/12 19:08
  •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할레드 호세이니
  • 12,150원 (10%670)
  • 2007-11-25
  • : 15,396

※ 이 리뷰에는 책의 결말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람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12월에 읽고 이제야 쓰는 글.


대한민국 외교통상부가 여행 금지 국가로 지정한 나라 중에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곳이 있다.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이 나라는 수없이 많은 침략을 받았고, 침략행위에 대한 국제의 간섭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현대에도 이 나라는 정치 불화 및 전쟁으로 인해 안정적이지가 못하다. 막대한 아편 생산량으로 인해 여러 무장단체가 자금원으로 삼기 위해 침략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으며 124년간 국기가 22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6년에 한 번 꼴로 체계와 이념이 갈아치워지는 이 나라는 잊을 만하면 뉴스 보도에 등장하였는데, 2003년과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출신 미국인 의사가 쓴 감동적인 소설로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적인 현대사를 배경으로 주인공의 삶을 풀어내는 두 작품 중 2003년작인 <연을 쫓는 아이>가 개인의 내면적 상처와 치유, 성장에 집중했다면 2007년작인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거대한 흐름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표류하는지 조망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연을 쫓는 아이>보다 전개가 강렬해졌고 내포된 메시지는 더욱 깊어진, 훌륭한 속편이자 수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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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조차 그녀를 원하지 않고 고통만 주는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마리암, 미래에 대한 희망, 사랑하는 사람을 폭격으로 잃고 어쩔 수 없이 비열하고 폭력적인 남자의 후처가 된 라일라의 이야기를 따라가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하는 <토지>와 <혼불>이 떠오른다. 한 가문을 중심으로 고통스러운 시대를 견디며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토지>가, 한 여인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와 문화를 따라가며 삶의 방법과 집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혼불>과 유사하다. 그러나 두 작품이 제기하지 않은, 여성에 대한 이중잣대를 분명하게 짚어내고, 역사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두 작품과 큰 차이점을 보인다.


태생부터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는 마리암의 이야기에서 소녀다운 꿈과 가능성을 갖고 있는 라일라의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작품의 분위기는 잠시 밝아지지만,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런 라일라의 소망은 예기치 않은 폭격으로 날아가버린다. 보다 진보적인 가치를 내재한 여성상을 상징하는 라일라가 폭격에 휘말려 어쩔 수 없이 구 체제에 복속되면서 작품은 암울하면서도 팽팽한 긴장 상태로 전환된다. 남편 라시드는 두 아내와 딸에게 폭행을 서슴지 않고 아들 잘마이만을 떠받든다. 이들이 살고 있는 카불에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면서 재정 상황도 악화되지만 그는 여전히 잘마이만 생각하며 무리한 지출을 일삼는다. 심지어 라일라의 딸을 고아원에 넘겨버리고, 남편과 동행하지 않은 아내가 길에서 얻어맞는데도 그것을 방치한다. 그러다 죽은 줄 알았던 라일라의 연인이 돌아오자 라일라를 죽이려 하고, 이를 보다못한 마리암이 라시드를 죽이고 만다. 라일라는 마리암과 함께 도망치고 싶어했지만 마리암은 탈레반의 추격을 따돌리기 위해 집에 남는 것을 택하고, 결국 탈레반에 의해 죽는다. 라일라는 무사히 연인과 재회, 파키스탄으로 도피한다. 그러나 마리암에 대한 그리움 및 고향에 대한 책임감으로 카불에 돌아와 고아원에서 아이들의 교육을 맡고, 가족과 함께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을 생각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인상적인 것은, 인물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항상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순진한 소녀였던 마리암이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것은 어머니 나나의 자살이었고, 첫 아이의 죽음과 함께 인간으로서의 마리암의 삶도 죽음을 맞았다.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로, 마냥 착한 딸이었던 그녀가 어머니로부터 독립되어 자아를 확립한 계기가 된 것은 오빠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칩거한 뒤였다. 친구 기티의 죽음은 라일라를 둘러싼 상황이 불길하게 흘러갈 것을 암시했고, 말할 것도 없이 부모님의 죽음, 그리고 연인의 죽음에 대한 거짓 소식은 라일라의 미래를 완전히 파괴했다. 마리암이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는 아버지 잘릴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다. 분량이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으면서 주인공들의 인생과 시대를 암울한 나락으로 끌어들이지만 단 한번, 최선의 선택이었던 죽음이 있었다. 바로 라시드의 죽음이다. 그는 탈레반, 마리암과 함께 전통적 가치와 권위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일방적인 피해자이자 약자였던 마리암이 최후에 그를 죽여 관계를 역전시켰고, 전통적 가치의 수호자인 탈레반은 마리암을 죽이지만 이는 전통 체제의 또다른 기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행위가 되어 그들이 가진 자기모순을 극대화한다.


마리암은 죽음으로써 체제로부터 벗어남과 함께 체제의 모순을 폭로했고, 라일라는 마리암의 죽음으로 탈레반의 추격을 따돌리고 새 삶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미래를 위한 희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라일라가 얻은 현재는 정말로 소중하다. 라일라가 가족과 함께 세 번째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남자아이가 태어날 때 이름 후보로 언급된 것은 예언자의 이름인 모하메드, 가상의 영웅인 클라크, 그리고 평화를 뜻하는 아만, 번영을 상징하는 오마르이다. 난세에서 희망이 된 영웅의 이름, 혹은 시대에 대한 소망을 담은 숭고한 이름과 나란히 한 또다른 후보 이름이 있다. 여자아이가 태어났을 때 붙여주기로 정한 이름, 바로 마리암이다.


수많은 죽음이 쌓여 만들어진 행복은, 작중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고통스럽다. 그리고 고통스럽지 않은 행복은, 비단 아프가니스탄만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이야기를 담은 <토지>, <혼불>만이 아니라 아무런 접점이 없는 머나먼 나라의 아픔을 담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에도 감동을 받는다. 인류 공통의 집단적 경험,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사건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통칭이다. 들여다보면 추악할지도 모르고, 부패한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 뚜껑을 덮고 잊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아픈 시간이 있기에 현재가 있고, 미래에 대한 소망도 생긴다. 라일라 가족에게 있어 마리암의 이름은 고통스러운 과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들의 삶을 구원한 영웅이자 미래를 향한 소망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마리암의 이름을 잊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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