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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짱구님의 서재

한국 소설을 읽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딱히 답할 말은 없지만, 어린시절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50권(이게 아마도 100권짜리일텐데 엄만 50권까지만 우선 사주셨다), 학창시절 김홍신의 '인간시장', 그리고 스무살 넘어서 이외수의 '들개'로 이어지는 내 읽기의 역사는, 김한길의 '여자의남자'에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 뒤로 출간됐던 한국 소설들은 제정신 아닌 주인공들을 쿨하고 앞서가는 시대의 흐름인양 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시도들이 좀 보였고, 그런 것들이 정내미를 떨어지게 만든 부분도 좀 있는것 같다.

얼떨결에 읽게 된 '벌집에 키스하기'는, 그런 나를 다시 소설 쪽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철학서적이나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서적들보다 객관적인 무게감이 좀 떨어져 보이는 SF 소설이라 하지만 작가의 표현력은 철학자의 그것이라 해도 좋을 정도이다.

특별히 중요하다거나 기억할 만한 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중요한 순간들보다도 더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순간들이 있다. 캐럴을 그런 순간들을 나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주듯이, 선명하고 정확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그런 순간들을 묘사해 낸다.

색연필을 오른손에 쥐고 마음에 꼭 드는 구절이 나올 때마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이 작가의 다른 책들도 심하게 궁금해진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한편으로는 "가지가지 하는군"이라든가, 강물 위로 떠오른 시체를 보면서 고등학생이 내뱉은 "야, 씨발, 저거 뭐냐?" 라는 대사들을 보면서, 번역자의 힘을 새삼 느꼈다. 역시, 훌륭한 번역자는 대상언어에 대한 문리적 이해뿐만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대해 천부적인 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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