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존하는 여자, 이후의 삶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를 읽고 김잔디 씨에게
먼저 하이파이브라도 하고 싶다. 편집되지 않은 당신의 통문장으로 된 책을 펴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용도가 아주 많다. 당신 스스로와 가족을 위한 것일수도, 법적 대응의 참고자료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그저 자극적인 단어 몇 개 가지고 입을 동동거리는 자들을, 당신의 진실, 당신의 책으로 그들을 싸대기 때리는 것과 같다는 점이다. 단편적으로 짜깁기 된 찌라시, 자극적인 말, 선동의 말, 이것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입니까? 한 개인의 삶은 조각조각 해체된 채 나와 상관 없는 말에 붙들려 형해화 되는 것이 아니다. 꼭 등산갔다 실종되야 사람이 죽나? 프레임 속에 갇혀 내일이 없는 삶이 죽은 삶과 같다.
당신은 실존하는 사람입니다. 허상의 나약한 이미지 안에 갇힌 전형적인 피해자일 필요가 없고 또 애써 무리하면서 강함을 연기할 필요도 없다. 그저 자연스러운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은 편집된 것이 아닌 통으로 된 진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삶으로 증명한 당신은 특별한 입지전적 인물이면서 동시에 또 여느 다를 것 없는 동시대의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여성이기도 하다. 그 두가지 다 당신의 삶의 측면 아닌가?
틀에 박힌 말 위로랍시고 하고 싶지 않다.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냐, 나쁜 사람들!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잘 될거야, 힘내! 이런 진부한 말조차 지치는 순간이 오고 공감마저 무거운 시간이 있기에. 어쩌면 당신이 미처 표현하지 못했을 분노를 내가 대신 욕을 해주고 싶기도 했고, 나는 이 책을, 어떤 피해라던가 해명이라던가에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읽지 않았고, 한 개인의 삶의 맥락을 그린다는 관점으로 접근하여 나는 당신의 실존과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피해호소인이 아닙니다>를 읽으며 떠올린 고전 문학 두 권이 있다. 바로 <햄릿>과 <이방인>이다. 당신도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 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운명을 치열하게 고뇌하였고 박시장이 실종되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느낀 허무와, 나도 죽어야 하나 내가 사는게 사는 게 아니다, 죽으면 내 피해가 증명되나, 하지만 가족들을 위해 나는 살아야 한다, 등등 끊임없이 극단적인 생각 사이에서 오갔다는 점, 그리고 나에게 사건이 일어났는데, 주어진 질문에 한 치의 거짓없이 솔직하게 증언했다는 이유로 점점 나는 왜곡되고 사회와 세상의 부조리 속에 내 자신의 진실과 내가 유리되어서 낯선 사람이 되고, 마치 이게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무감각, 무력해지는 점.
나는 한 여자의 삶에서 햄릿과 뫼르소를 보았다. 이렇듯 여러 가지가 뒤엉킨 복잡한 상황과 맥락 여러 사람의 운명, 때로는 장난 같고 가혹하기도 하다. 순리대로 흘러갔으면 좋으련만 예측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는 삶. 너무나 다른 각자의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물을 헤치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한 줄기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면, 여자도 이미지가 아닌 실존적인 존재라면 당신의 이후의 삶이 기대된다고 생각했다.
이런게 저널리즘이지 다른게 있나? 여자도 어떤 존재일 수 있다. ㅇㅇ녀 무고녀 피해호소녀 같은 저급하게 싸잡은 멸칭이 아니라 어떤 존재일 수 있다. 이런게 인권이지 다른 어려운게 있나?
인권이라는 말이 많이 호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단체의 인권은 그들도 여러 가지 계파와 입장이 있어 복잡한 건 내가 잘 모르겠지만, 한 여자의 진실을 감성팔이, 자극적인 이슈가 아닌 삶이라는 관점에서 보고 당신의 목소리와 고발을 어떤 존재가 내는 목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이 무슨 핀셋방역도 아니고, 뭐하나 잡고 물고 늘어지면서 피해호소인이니 뭐니… 입체적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감수성을 모르는 걸까요? 동물이 아닌 사람이니까, 그 차별화되는 지점을 고려하고 고민하는 것, 진정으로 인간다움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당신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참담함을 느꼈던 부분이, 당신이 ‘인간 박원순을 이해해보려 했다’는 대목이었다. 이해. 이해. 그들은 당신을 ‘이해’하려 했는가? 그랬다면 일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고. 그리고 사건 뒤에 당신에게 가해진 2차 가해들. 그것들은 프레스기로 여자를 짓눌러버리는 행위였다. 왜 남자에게는 평소에 그럴 사람이 아니다, 다른 의도였다 등 입체적으로 이해하면서 여자에 대해서는 한마디로 일축하는가? 이것이 바로 여성의 실존에 대한 억압이다. 살아 숨쉬는 입체적 인물인 여자를 프레스 기기로 납작하게 만드는 폭력에 다름없다. 왜 당신이 상냥한 말투를 쓸 수 밖에 없었는지, 단체 활동에 참여하며 억지로 미소라도 지었는지, 나는 대충 무슨 분위기였는지 뻔히 알아서 더 울화통이 터졌다.
나도 서울시 자치구 소속의 한 공무원으로서 비슷한 일을 겪은 적 있다. 한 구청 관계자는 인사권과 임용권을 가지고 나를 부당하게 압박하였으며 상담을 핑계로 불륜을 제의하고 응하지 않자 나를 계속해서 기피보직만 보냈으며 내가 쓰러질때까지 계속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를 압박하였다.
어느날 TV에 뉴스가 나와 알게 된 사실인데, 다른 피해자가 마찬가지로 임용권을 이용한 갑질을 당하였고 피해자는 그를 부정수당 편취로 신고하고, 언론에 알려서 피해를 당한 것이 나 하나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또한 최근에도 그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막말을 들었다는 피해자들의 글이 게시판에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 지역에서 아주 오래 살아온 사람d로서 아직도 공직을 유지 중이며 뻔뻔하게 살고 있다. ‘가렴주구’라는 말이 떠오르더라. 이게 탐관오리가 아니면 뭘까. 하지만 내가 당신의 책을 읽고 이 글을 쓰고 있는건 내가 부당한 압박 속에서도 결코 나를 찌그러뜨리지 않으려 노력했고, 가만히 참고 있지만 않고 행동함으로서 구겨진 부분을 펴내고자 했기 때문이겠지요?
노파심이지만, 당신도 혹시나 훼손되었다는 생각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왜 여자는 훼손되어야 합니까 고난과 역경을 딛고 살아내는 삶을 누군가 여자로서 가치가 ᄄᅠᆯ어진다고, 무난하지 않다고 비난하거나 부담스럽다고 여긴다면 참 슬플 것 같고,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기분일 것 같다. 이것 또한 여자를 그저 이미지로만 보고, 여자를 상품 취급하는 면에서 오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그저 해맑게 방긋방긋 웃고 예쁘게 돌려서 말하고 난처하거나 곤란해도 그저 좋게 말하면서 ~ 이런 건 없다. 여자는 뽀송뽀송 솜털이 나 있는 아기피부, 결점하나 없는 도자기피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심층적인 것들에 대해 모르는 피부 같은 것이 여자의 본질이 아니다. 그저 참하고 착하고 손으로 입가리고 웃고, 전 몰라요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아요 인것 같아요. 이런 것만 여자가 아니고 피흘리는 상처를 입어도 싸우고 스스로 꿰멜 줄도 알고 그런게 여자 아닌가. 여자도 본질에 대해 논할 수 있고, 한없이 치열하고 진지해질 수도 있다. 햄릿처럼 사느냐 죽느냐 고뇌에 치열하게 몸부림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너무 고통스럽다면 아예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자신의 문제와 사회의 부조리를 무감각하게 바라볼 수도 있다.
이런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맥락속에 놓여진다는게, 흔들린다는게, 흔들림 속에서 나를 찾으려고 하는 노력이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지, 그저 죽었나 살았나 죽었으니 무죄다 죽음으로 증명을 한다느니 살면 멘탈이 강하다느니 하는 일차원적인 말로 재단내리는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 혼란스러운 여러 일들 속에서 언제고 나를 끌고 가려는 사람들과 여러 입장들 속에서 나의 길을 찾는 것. 그것이 살아지는게 아니라 살아가는 존재의 증명이고 사람은 단지 추구하는 존재이지 이미 다 만들어져 일관성을 지키는 로봇이 아니다.
여자는 순진한 존재가 아니다. 세상이 그저 공정하고 아름답다고 마냥 믿지도 않으며, 사람들의 추한 면 꼬인 면 다 알게 되지만 그 속에서도 순수함과 인간미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게 가치가 있지 그저 모른다고 때묻지 않았다며 가치가 높은 삶이라 할 수 있나? 여자도 때로는 모순적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소용돌이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으려고 빛이 보이는 쪽으로 향해 가는것 추구하는 것 자체가 인간다움이고 가치 아닌가? 그런 여자들의 눈빛은 남다르다. 그런 여자들의 눈빛은 정말 남다르다.
당신이 꼭 보았으면 하는 영화가 있다. <언더 워터>라는 여성원톱주연 영화. 한 의대생이 해변에 갔다가 상어에게 공격을 받아 죽을 뻔하지만, 결국 싸워서 상어를 죽인다는 줄거리다. 그 의대생이 상어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아픔을 참고 숨을 참고 자신의 의학적 경험을 활용하여 상처를 스스로 꿰매는 수술을 하는 장면에서 나는 여자의 존엄을 느꼈다. 결국 의대생은 상어를 죽이고 집에 가서 가족들과 재회한다. 이런 엄청난 일을 겪고 죽다 살아났으니까 다시는 물 근처에도 가지 않았냐고? 아니. 서핑을 즐기는 모습으로 엔딩이 난다.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당신에게 다시는 시청 근처에도 안 가야지 피해를 입은거 아닌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것은 조선시대 은장도의 현대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사건을 통과하였다고 하여 꼭 어떤 이념을 열렬하게 지지하는것도 남자를 혐오하는것도 아니며 양비론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을 납작하게 만드는 이분법적 사고이고 이것 또한 편견이고 단편적으로 이후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느 다를 것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 정치나 이념 단체의입장은 그들의 입장이고 개인의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냥 당신은 실존하고 있다. 전부 다 이해받고 증명하고 해명할 필요도 사실 없다. 그냥 당신은 그 자리에 실존하고 있고, 뭐가 어떻든지 당신은 당신이다. 알리고 싶은 만큼만 알리고, 모호하면 모호한 대로 가치가 있으며 원하는 시점과 원하는 위치에서 드러내고 할 말을 하면 된다.
삶을 살아가다 보면 목표가 생겨 의욕이 넘치는 순간도 물론 있지만 나의 손을 떠나버린 것들에 안타깝고 힘이 빠지며 주저앉고 싶은 순간 또한 있다. 나의 의도는 이게 아니었는데, 어떤 것들은 물놀이하다 놓친 공처럼 너무 멀어져 버리고, 내 노력과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도, 이게 상식이 맞나? 싶은 일도 많이 있지만, 그 파고를 넘어선 여자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굴곡이 빚어낸 자연의 절경은 파고를 넘어선 여자만이 볼 수 있다.
'이번 파고는 넘지 못할것 같다'는 말을 젠더특보에게 남기고 산에 오른 박시장. 그런게 어딨나? 이번 파고는 넘지 못할거 같다. 그 파고를 켜켜이 쌓아온 것은 자기자신이다. 누가 들으면 문학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이고 유언으로 여운을 남긴다고 볼수 있지만. 그 파고는 하루아침에 생겼나? 하루 하루 행동한게 쌓여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다.
아마 질릴 만큼 보았겠지만, 그 시장실에 a4용지 천장까지 쌓아놓은 사진 같은 것이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비좁은 공간에 굳이 쌓아놓고 전시한 건 자기자신이다. 그것이 무너져 내린다면 천재지변도 아니고 산사태에 깔리는 것도 아니다.
이런 일들 또한 파고일 수 있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 파문 일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여자로서 잔잔하고 안정적이고 참한 여자의 삶이라고 바라보는 시선도 있겠으나, 내가 보는 관점에서 그건, 떨림이 없는 삶이다. 나는 당신이 지금껏 붙들었던 당신의 진실과 주관 그리고 목표를 딛고 서서 즐겁게 파도를 서핑하며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란다.
당신은 시청에 복귀했다. 지금쯤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겪어 보니 사람들은 참, 말을 두려워하면서도 정말 말을 많이 하더라.
뭐만 하면 말 나와, 말 나오니까, 말 나올까봐.
말 나온다는 말이 우습다. 그렇게 말 나온다며,호들갑떠는 사람이 경험상 아무 것도 안해도 가장 쉽게 소문의 소재가 된다. 문제란 문제라고 의식하고 움츠리는 순간에 ' 관찰'되는 것이다. 꼭 내용이 중요할까? 내용이 중요한게 아니다. 남얘기 해보면 알지않는가. 그냥 쟤는 어딘가 어설프고 영향 많이 받고 약하니까? 얘긴 쉽게 해도 된다는 인식이 중요하디. 즉 기가 약하기 때문이다. 정말 강한 여자는 말이 나오는 것을 수동적으로 감지하려 팔랑귀처럼 뒤뚱거리지 않고 말을 만들어 아젠다를 갖고 판을 끌고 간다. 그런 여자에게 나오는 말은 이상하게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수록 점점 강해지고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다. 사람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들의 궁금증을 간파하고 여유있게 미소짓는건 멋지지 않은가? 그러면 우위는 다시 이쪽으로 온다. 그게 기세다. 난 사람이 강하다는게 뭘까 자주 생각한다. 말을 잘 하는 사람? 무서운 사람? 이중적으로 정치질을 잘하는 사람? 아니. 기세는 진심과 전략이 일치할 때 나오는 것이다. 뭔가 들통난다라는 두려움이 사람을 결정적 순간에 얼마나 추하게 망가뜨리는지 알지 않는가. 사람들이 이러쿵저러쿵하는거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기세로 밀어붙이고 당신이 책으로 증명해 보였다.
’네 삶이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당신이 세상에 일을 알리고자 했을 때, 조언을 빙자한 가스라이팅을 한, 그 선배라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김잔디 씨는 소용돌이에 빠져서 허우적대며 가라앉는 사람이 아니라고. 위기 상황이 처했을때조차 가식적이라면 필사적으로 손발 맞추어 헤엄칠 수 없겠지만, 당신은 진실이 있는 사람이고 당신은 다쳐도 수영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 팀장의 우려는 틀렸다.
당신은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상담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시청에 복귀했다고 하였다.
더이상 발디딜곳 없이 기댈 곳 없이 허우적거리는 상황이 아니다. 당신의 진실로 당신의 진실을 딛고 서서 당신이 원하는곳에 창을 내어 원하는 프레임으로 보고 파도가 치는 바다를 서핑하는 여자로서 이후의 삶을 살아가기를.
그리고 가장 높은 파고에서 내려오기 전에, 고개를 들어 정오의 태양을 똑바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신이 있으면 나를 좀 쳐다보라고.
그리고 누가 나중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묻거든
‘그냥... 햇살이 참 눈부시던데요’ 할 수 있는 여유까지 갖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