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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군주론
  • 니콜로 마키아벨리
  • 14,400원 (10%800)
  • 2019-06-30
  • : 974
을유문화사의 <군주론>은 1980년 초판 이후 거의 40년 만에 나온 전면개정판이다. 한 번 출간한 책을 개정하고 또 개정하고, 전면개정판까지 낸 것을 보면 역자가 <군주론>을 얼마나 아끼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 역자가 <군주론>을 읽고 옮기면서, 마키아벨리를 이해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애정이 들어갔을지를 생각하면 350쪽 가량의 책이 더 무거워지는 듯하다.


중학생 때 이후로 세계사를 배워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군주론>은 섣불리 손댈 수 없는 책이다. <군주론>이라는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위압감과 마키아벨리를 둘러싼 비난과 오해가 나같은 독자들을 더 멀어지게 한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음은 분명하다.


내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는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과정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인간성을 두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겪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므로 마키아벨리의 저서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그를 겪어보는 것은 의미있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군주론>을 충분히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내가 알고 있던 정보의 근거를 찾아보는 데 의의를 두었다.


본래 <군주론>은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봉정하려던 것이었으나, 줄리아노가 피렌체를 떠남으로써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봉정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자신의 글을 다른 이에게 헌정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마키아벨리는 국내외적 혼란 속에서 피렌체를 구제할 인물이 메디치가에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한 군주의 덕목을 <군주론>에 담아 헌정한 것이다.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그가 독재 정치를 옹호했다는 것인데, 사실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공화론자이면서 <군주론>을 쓴 이유는 마키아벨리가 보기에 당시 피렌체에 공화정을 도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군주정이 최선이었기 때문이다. <리비우스 역사 논고>와 같은 그의 다른 저술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군주론>만 읽는다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다.


그리고 현지의 소수 원주민들을 억압하여 땅과 가옥을 빼앗아 이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 지배자가 억압한 사람들은 힘도 없고 가난하고 또 흩어져 살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를 해코지할 정도는 되지 못합니다. - p.56

따라서 그들이 더 이상 믿으려 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력으로라도 믿도록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예언자는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만 합니다. - p.97

셋째, 폭력을 쓰든 기만을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승리할 것...<중략>...여섯째, 자기를 해칠 수 있는 힘을 가졌거나 그럴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을 숙청할 것 - p.118

...인간은 지나치게 조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과감한 것이 더 좋은 방법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의 신은 여성이어서 그를 정복하고자 한다면 힘으로써 대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 p.300


위와 같은 문장들은 마키아벨리가 생각한 강력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약자에게는 무력을 써서라도 권위를 얻어야 하고, 위협이 되는 사람들은 과감히 숙청해야 하지만,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나로서는 과격한 주장으로 보인다. 강력한 왕권을 위해서라면 과정은 비도덕적이어도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의 리더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들은 약자를 위하는 척하면서 권위를 얻고, 위협이 되는 사람들을 교묘히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며,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신경쓰지 않는다. 과격해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이렇게 생각하면 현대의 리더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국권을 잡은 사람은 그가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모든 악행을 심사숙고해야 하며, 악행을 저질러야 될 경우에는 한 번에 몰아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매일같이 새롭게 악행을 저지르지 않게 될 것이며, 악행을 되풀이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주며, 그들을 유익하게 함으로써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 p.129

왜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착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은 착하지 못한 숱한 사람들 사이에서 파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부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모름지기 악한 짓을 저지르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그것이 언제 필요하고 언제 필요하지 않은가도 알아야 합니다. - p.196

그러므로 후덕한 인심보다 더 빨리 자신을 망가트리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하께서 선심을 쓰시는 동안 전하께서는 선심을 쓰실 수 있는 잠재력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궁핍하게 되거나 멸시를 겪게 되고, 궁핍을 벗어나려니 남의 것을 강탈함으로써 원망을 사기 때문입니다. - p.204

인간은 남을 해치면서 남들로부터 두려움을 받고 있는 사람보다는 남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을 더욱 얕잡아 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이란 의무라고 하는 쇠사슬로 묶여 있는 것인데, 인간이란 본시 사악한 존재여서 의무라는 것도 자기에게 유리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언제라도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형벌의 무서움에 의하여 확보된 것이어서 결코 전하를 낭패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 p.210

그러므로 사려 깊은 군주라면 신의를 지키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가 되거나,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유가 소멸됐을 때에는 신의를 지킬 수도 없으려니와 지켜서도 안 됩니다. 만약 인간이 전적으로 선량한 존재였다면 이러한 충고는 부도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악하며, 또한 그들이 전하에게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전하께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부담을 갖지 않습니다. - p.221


‘인간은 서로 배려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정반대로 ‘군주가 남을 배려하며 착하게 살면 멸시를 당하기 쉽다’는 것이 마키아벨리의 주장이다. 군주정에서 최선의 군주의 모습을 설명한 것이므로 독재 정권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적절한 시기에 악행을 쏟아부어 피지배층의 두려움을 얻기 그리고 손해를 보면서까지 선행을 베풀지 않기. 수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군주’나 ‘독재자’에게는 중요한 행위일 것이다. 전쟁과 혁명이 빈번히 일어났던 시대를 감안하면 마키아벨리의 주장을 무조건 비난할 수는 없다. 현대에도 과격해 보이는 그의 주장은 당시에는 더욱 과격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논리는 지나치게 현실적이라 비판하고 싶어도 막상 입이 떨어지지는 않는다.


내가 알고 있던 대로 마키아벨리는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과정은 신경쓰지 않았다. 쓰고 보니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과정은 신경썼지만 과정의 윤리성은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강력한 군주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갖추고, 다른 사람에게 미움과 멸시를 받지 않는 대신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고, 주체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혼란스럽던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이 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사랑하고 이탈리아를 통일하고 싶어했던 애국자였다. 이것은 많은 학자들이 마키아벨리의 오해를 풀고자 강조하는 바이다. 현대의 기준이 아닌 당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그에 대한 오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일 것 같다.


5세기 전에 쓰여진 <군주론>이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는 분명히 존재한다. 군주의 덕목을 현대의 지도자에게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통치 체제도 다르고 비도덕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하고 적용할 만한 내용은 ‘주체성’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세우고, 다른 나라에 휘둘리지 않고 국가를 통치하여 성장시키는 힘 말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군주라면...<중략>...남의 군대의 힘을 빌려 이룬 승리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남의 군대로 승리하기보다는 자신의 군대로 패배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 p.175

군주는 자신이 동지냐 아니면 적이냐를 분명히 할 때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주저하지 않고 어느 군주에게 호의나 적의를 분명히 할 때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보다 항상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의 두 강대국이 다투게 될 때 그 둘 가운데 하나가 승리하게 되면 전하께서 그 승리자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거나 갖지 않거나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차라리 그럴 바에는 전하의 입장을 분명히 하고 정정당당하게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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