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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trice1007님의 서재
  • [전자책] 통
  • F. W. 크로프츠
  • 6,800원 (340)
  • 2025-07-08
  • : 20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에 발목을 잡히다
- 프리먼 크로프츠, [통]/[크로이든발 12시30분], 1920~1934.


추리소설을 좋아했지만 영국작가 '크로프츠(Crofts)'는 처음 들었다.

어린 시절의 나를 책으로 유인한 게 '추리소설'이었다지만, 사실 난 코넌 도일과 애거서 크리스티, 엘러리 퀸의 팬이었지 다른 작가들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 유명 추리소설 작가로 꼽힌다는 길버트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나, 엘러리 퀸의 전형과 같은 S.S. 반다인은 그래도 들어는 봤더랬지만, '프리먼 크로프츠'는 진심 처음 듣는 작가였다.

'크로프츠'는 역시 격주 토요일 동네 뒷산 초안산 종주를 하고 마을 도서관에서 본 <동서미스터리북스>의 각종 '작품해설'을 통해 접하게 된 영국의 추리소설 작가였는데, 
내가 그를 알게 된 '테마' 또는 '키 워드'는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이다.


"'슬픈 당신의 에이미로부터'라고 서명한 편지, 커튼에 꽂혔던 굽은 핀, 압지에 남은 틀림없는 필적의 자국, 경감은 이러한 세 가지 발견으로 훼릭스의 유죄를 결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는 반대로 '통(The cask)'을 열었던 흔적에 대해서는 끝내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는데, 번리(경감)로서는 이토록 철저한 수사를 한 이상 '통'을 연 것은 여기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번리는 자기의 수사가 바야흐로 정확한 궤도로 나아가고 있다는 자신을 얻어 더욱 그러한 생각으로 밀고 나갔다..."
- [통], <제1부. 런던>, 프리먼 크로프츠, 1920.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이란 '거꾸로 뒤집어서 역행적으로 서술한다'로 번역될 수 있겠는데, 사실관계의 퍼즐을 맞추면서 퀴즈를 풀듯 범인을 추적하는 기존 추리소설의 서술방식을 '뒤집어(倒) 서술하는(敍)' 방식으로 보면 된다.

영국의 철도회사 토목기사였던 프리먼 윌스 크로프츠(Freeman Wills Crofts:1879~1957)의 추리소설에서는 다른 추리소설 작가들의 주인공 같은 '천재 명탐정'이 없다. 크로프츠의 '프렌치 경감'이나 '번리', '르빠르쥬' 경감은 그냥 좀더 부지런하고 유능한 '민완형사'이고, 사립탐정 '라 튀슈' 또한 갈피를 영 잡지 못하다가 우연히 실마리를 잡고는 '머리'가 아닌 '발'로 끝까지 추적하는 '프롤레타리아' 탐정에 가깝다.

계명대 영문과 계정민 교수는 [범죄소설의 계보학](2018)을 추적하며, 주인공의 변천 과정을 '범죄자-부르주아(또는 귀족) 탐정-프롤레타리아 탐정'의 계보로 정리한다. 

18세기 영국 초기 자본주의 시대 '뉴게이트 소설'은 중죄인 수감소 '뉴게이트' 감옥의 범죄자들의 악행을 고발하는 내용의 글이었다는데 오히려 이런 찌라시들이 당대의 불평등한 체제를 반증하는 '영웅소설'로 반전되는 과정이었고,
이런 흐름에 맞서 보수주의 귀족(또는 부르주아 지배계급) 층에서 내세운 '반(反) 영웅'들이 바로 셜록 홈즈와 에르큘 포와로, 오귀스트 뒤팽과 파일로 번스 또는 엘러리 퀸 같은 명문대 출신 '천재 탐정'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던 이 탐정들의 임무는 '체제 수호'였고, 성인이 되어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잠시 실망하기도 했더랬다.
이후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미국식 모험소설로 이행되면서 주인공은 부패비리로 짤린 전직 형사와 같은 '생계형' 탐정, 즉 '프롤레타리아 탐정'으로 변화한다. 007 같은 특수요원의 전신이 아닐까 싶은 이 '프롤레타리아 탐정'은 두뇌는 '천재' 수준이 아니지만 성실과 근면, 무엇보다 목숨을 걸 정도의 끈기와 투지로 사건을 해결한다.

항상 이행과 변천 과정에서 '과도기' 또는 '이행기'에 집착하는 나는 여기에 또 '크로프츠'를 먼저 대입해 본다.


"'몹시 빙 돌려서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분명히 말한다면 내가 아내를 죽였다고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결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이런 사건의 경우, 누구를 막론하고 일단 모든 관계자의 행동을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당연한 직무로서, 우리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만,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통], <제2부. 파리>, 프리먼 크로프츠, 1920.


이제 '크로프츠'의 '도서 추리소설' 영역에 들어서기 전에, 그의 첫 작품 [통(The Cask)](1920)을 읽어보자.

프랑스로부터 영국으로 건너온 화물이 담긴 '술통(cask)' 속에서 여인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런던의 '번리' 경감과 파리의 '르빠르쥬' 경감의 멋진 케미로 범인을 거의 잡을 뻔한 1~2부와, 누명을 쓴 프랑스계 영국인 훼릭스(희생자 아네트의 전남친)가 변호사와 사설탐정를 고용하면서 진범인 피살자 아네트의 남편 보와라크의 혐의를 잡고 누명을 벗는 3부로 구성된다. 런던과 파리 경시청의 협조를 통해 밝혀지는 범인은 고전적 의미의 '누명'을 쓴 게 되고 이에 반전을 가하면서 진범을 잡는 탐정은 그럼에도 '천재'가 아닌 일단 두 경감들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끈기있는 인물이다.

독자들은 '크로프츠'를 읽으며 '천재 탐정'들로 인해 좌절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함께 쫓아다니고 같이 회의하면서 좌충우돌하면 된다. 
결국 '범인'은 밝혀지게 되어 있으니.

내가 생각하기로 '미스터리소설'에서는 최후에 범인이 드러나지 않아도 좋으나, '추리소설'에서는 범인이 밝혀져야 한다.
범인을 반드시 잡아야 하는 소설이 바로 '추리소설'인 것이다.


"그랬었구나! 센트 캐더린 부두로 간 '통(The cask)'-시체를 넣은 '통'-은 북 정거장에서가 아니라, 보와라크의 집에서 직접 나왔었구나!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니, 이 무슨 실수랴! 겨우 서광이 보이기 시작했다. 보와라크가 자기 아내를 죽인 것이다. 그녀가 살고 있던 그 집에서 죽인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시체를 '통'에 넣어 훼릭스에게 직접 보낸 것이다. 마침내 (탐정) 라 튀슈는 애타게 바랐던 증거를 파악했다. 훼릭스의 억울한 혐의를 풀고 보와라크를 교수대로 보낼 결정적인 증거를 잡은 것이다."
- [통], <제3부. 런던과 파리>, 프리먼 크로프츠, 1920.


그렇게 '크로프츠'의 영국과 프랑스계 혼혈 사립탐정 '라 튀슈'는 매우 성신근면한 활약을 통해 진범 보와라크(피살자 아네트의 남편)를 잡는다. 결말에서 범인은 저택을 불싸지르는 한바탕 활극을 연출하고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만, 결국 '라 튀슈'의 활약으로 댓가를 치르게 된 것인데, 20세기 초 '추리소설'의 끝은 법에 의한 '공적 응징'보다 대부분 '자살'하게 만드는 '사적 응징'이 많다.

'크로프츠'의 데뷔작이자 대표작 [통](1920)의 결론도 그렇다.


"... 그러나 '살인' 뒤에 오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불쾌한 결과가 생기는 것은 '살인'이 발각되었을 때뿐이다. 그런데 이 '살인'은 발각당할 리가 없다. 만일 예기치 않았던 사태가 일어나 일이 발각된다 해도 자살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그것으로 모든 일은 끝아다. 찰스는 죽은 다음의 세계 따위는 믿지 않았다. 이리하여 찰스는 마음 속으로는 의론의 논거가 빈약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 [크로이든발 12시 30분], 프리먼 크로프츠, 1934.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산업발전과 문명교류 및 문화진보의 중추가 되었던 철도산업에 종사했던 이공계 토목기사 '프리먼 크로프츠'가 부업으로 '추리소설'을 썼다는 건,
21세기 지금으로 치면 첨단 통신산업 또는 AI 기반 산업의 '본캐' 종사자가 '부캐'로 'SF 공상과학소설'을 쓰는 격 아닐까 싶다.

그 한 사례로, 중국계 미국인 작가 테드 창(Ted Chang)이 있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온갖 계산과 협상이 난무하는 손해보험회사의 보상직원이 온갖 인류의 '고전'을 읽고 '서평'을 써보겠다며 독후감을 남발하고 있어, '크로프츠' 같은 본업과 부업의 시너지를 별로 못보고 있기는 하지만.

'크로프츠'의 인물들이 활약하는 성실과 근면의 현장은 이공계 토목기사 '크로프츠'다운 세밀한 묘사와 현실감 있는 '리얼리즘'으로 가득하다. 

아일랜드 출생 영국 추리소설가 '크로프츠'의 '리얼리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이다.

1920년 리얼리즘' 추리소설 [통]으로 데뷔한 크로프츠'의 15번째 작품인 [크로이든발 12시30분](1934)은 '도서 추리소설'의 '세계 3대 고전' 중 하나로 꼽힌다고 한다.

영국에서 프랑스로 건너가는 '크로이든 출발 ' 0시 30분 비행기에서 독살당한 희생자 앤드루 클라우드 이야기로부터 1장을 시작하여 바로 2장부터 그를 독살한 조카 찰스 스윈번이 주인공이 되어 범죄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이를 덮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결행하는 과정이 찰스의 심리 묘사와 함께 리얼하게 전개된다. 찰스의 심리적 공포와 자기합리화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는 더 이상 범인을 쫓는 '추리소설'의 독자가 아니다. 작가가 애초에 서술을 뒤집었듯(倒敍;invert), 독자 또한 전통적인 추리소설의 독법을 뒤집게 된다(倒敍;inverted)'.


"'다음에 또 한 가지 머리애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즉 알약을 쓰면 범인은 절대로 안전하다고 여길 만한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병 속에 독이 든 알약을 넣기만 하면 희생자가 죽었을 때 범인은 얼마든지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요.'
...
'범죄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인 알리바이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에게는 이것이 무난히 통용되었겠지요. 현장에 없었는데 어떻게 혐의가 걸리겠는가 생각할 테니까요. 그리고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완전히 모습을 감출수록 완벽한 것처럼 생각되겠지요.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그것이 사람의 생각 아닙니까?'"
- [크로이든발 12시 30분], 프리먼 크로프츠, 1934.


[크로이든발 12시30분](1934)은 살인자의 관점에서 '완전범죄'를 구성하는 과정을 서술하다가 마지막에 런던 경시청 조제프 프렌치 경감의 의심과 수사로 되밝혀지는 이중 플롯의 서사를 보여주는데, 범인 찰스의 '자기합리화' 과정에서는 헛점이 없어 보였을지 모르지만, 런던 경시청 프렌치 경감의 노련한 수사기법으로 무너지는 '불완전범죄'의 진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이공계 토목기사 '크로프츠' 작가는 이 '도서(倒敍;invert)' 서술기법을 위해 당시 경찰당국의 과학수사 기법을 열심히 취재하고 면밀하게 연구분석했으리라, 소설을 읽는내내 독자로서 나는추측해 마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이번에 비록 처음 알게 되었지만, 20세기 초 영국의 추리소설가 프리먼 크로프츠의 '리얼리즘' 추리소설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이제 그만 다른 쟝르로 옮겨갈까 싶다가 '도서(倒敍) 추리소설'의 '세계 3대 고전'은 그래도 읽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에,

'프랜시스 아일즈'의 [살의](1931)와,
'리처드 헐'의 [백모 살인사건](1935)을,
마을 도서관에서 대출하게 된다.

이렇게 난 또 다시, 그리고 여즉,
'도서(倒敍:inverted)' 추리소설에 발목을 잡힌 채,
당분간 '미스터리소설'의 숲을 거닐게 되었다.

***

1. [통(The Cask)](1920), Freeman W. Crofts, 오형태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15.
2. [크로이든발 12시30분(The 12:30 from Croydon)](1934), Freeman W. Crofts, 맹은빈 옮김, <동서문화사>, 1977~2003.
3.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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