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은 누구나 불완전합니다. 사람도 호랑이도, 그래서 연민을 느낍니다. 연민은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까닭 없는 아픔이며,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한 번 나면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것들에 대한 막막한 슬픔입니다. 태어나 먹고살다 사라지는 것들이기만 하면, 아득히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겨울은 연민의 계절이다. 지하주차장 곳곳에서 은신하고 있는 길고양이들을 마주할 때, 혹한을 견디지 못하고 떠난 노숙인 소식을 접할 때 겨울이 야속하다. 어떤 계절은 특히 잔인하다. 이런 이유로 개인적으로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동물적으로는 여름이 낫다고 말하곤 했다(물론 둘 다 야속하긴 마찬가지다). 『꼬리』를 읽으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가졌다. 책에서 묘사되는 자연의 섭리가 아름다운 동시에 매정하게 다가와 ‘꼬리’에게 연민을 느꼈다.
‘꼬리’는 시베리아 숲 야생 호랑이의 이름이다. 자연 다큐멘터리스트이자 자연문학가인 박수용 감독은 꼬리와 함께한 마지막 1년의 시간을 『꼬리』에 담았다. 가장 크고 힘이 센 왕대 호랑이에서 노쇠한 호랑이가 되고, “이인자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위엄과 권위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냉혹한 생존 투쟁의 정상에서 바닥으로 곧바로 굴러떨어지”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게 더 어렵다고 한다. 가진 것들을 놓치기 싫어 발악하다 외려 험한 꼴을 보이게 된다는 건데, 책에 담긴 박수용 감독의 바람도 이와 결이 같다. 그는 꼬리가 무사히, 그리고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길 빌었다. 둔해진 몸과 추운 날씨 탓에 사냥을 하지 못하는 호랑이는 민가로 내려오고, 가축을 잡아먹고, 때때로 사람도 공격한다. 충분히 배를 채웠음에도 눈앞의 사냥감에 욕심을 내게 된다.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축의 알과 우유를 가져가듯 호랑이도 가끔 개와 소를 가져가는 것”이지만, “인간은 자연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기에 야생동물의 그런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저자는 꼬리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돕는다. 사체에 폭죽을 설치하고 멧돼지로 유인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서 말이다.
꼬리는 배가 고파도 사람과 가축을 구분했고, 자신의 뒤를 밟는 인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현명한 호랑이였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죽을 때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다. 저자는 ‘용의 등뼈’에서 발견한 호랑이의 주검이 꼬리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지만,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 시대를 호령하던 왕대 호랑이의 말년은 처량하면서도 애틋하다. 의지할 구석도 없이 매 순간이 전쟁이었을 생을 무사히 마친 꼬리가 대견하고 또 그립다.
* 이 서평은 김영사 대학생 서포터즈 활동의 일환으로 김영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죽음 때문에 삶을 내팽개쳐도 안 되지만 삶 때문에 죽음을 내팽개쳐도 안 된다. 그것이 자연에서 죽음이 삶을 끌어안고 삶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P84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잊게 했고 꼬리로 하여금 오로지 지금만을 생각하게 했다.- P152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이 건초창고 안에 떠다니는 저 먼지 같은 거야.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한 번 나면 한 번 죽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들이지. 태양이끈을 놓으면 인간이 이루어낸, 아니 지구가 이루어낸 모든 것이 사라져.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합쳐도 주정뱅이 노래 하나 막지 못하고 풀 한 포기자라는 걸 막지 못하지. 우리 모두는태양의 미세한 요동에도 깜짝깜짝 놀라며 외줄을 타는 지구의 광대들일 뿐이야. 그런 어릿광대들끼리 말이 좀 통하지않는다고 우습게 보고 괴롭힐 건 또 뭐야.- P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