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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카노르
  • 데미지
  • 조세핀 하트
  • 21,600원 (10%1,200)
  • 2026-06-05

조세핀 하트의 <데미지>를 읽고…


“헤엄치고 다이빙해서 그들로부터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그들의 물속에 있는 기분이다.” (18쪽)

화자는 자신이 처한 실존적 질식을 고백한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자마자 부모 사이에 상처(damage)를 남긴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에게는 부모가 곧 세계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방을 썼다는 것은 아이의 세계가 두 조각으로 균열했다는 의미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은근히 강압적인 존재였다. 그렇게 화자의 아버지가 규정한 신념, 품위, 성공이라는 견고한 ‘상징계’의 바다에서 단 한 번도 온전히 스스로 숨 쉬어보지 못한 억압 상태의 주인공이 방백처럼 읊조린다.

재미있는 점은 이 소설을 통틀어 화자의 ‘이름’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아버지, 유명 장인의 사위, 정치인, 전직 의사 등… 타인들이 인식하는 껍데기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었던 이 답답함이야말로 그가 평생을 안고 살아온 거대한 무의식적 결여였다.

겉으로는 모든 게 완벽해 보이지만 그의 눈은 어딘가 텅 비어 있다. 그런 눈에 어느 날 안나가 가득 찬다. 그가 안나를 첫눈에 사랑하게 된 것은 그녀가 지닌 매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금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아무런 제약이 없는 상황이었다면, 억압의 둑을 터뜨리는 파멸적 쾌락도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안나가 시아버지가 될 화자에게 “당신을 지배자로 만든 게 내 복종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고백은 의도된 기만이자 일종의 심리 게임이다. 화자는 자신이 성적 관계를 주도하며 지배한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안나가 복종이라는 가면 뒤에서 그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아버지의 통제 아래서 주체적이지 못한 자신을 숨 막혀 하면서도, 역설적으로 여성의 언어로 구현된 또 다른 방식의 통제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가 몸에 좋지 않은 줄 알면서도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는 것처럼, 이성의 억압을 풀기 위해 참을 수 없는 충동에 기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문신을 새기고, 누군가는 가려운 곳을 피가 날 때까지 긁어대며, 또 누군가는 주어 없는 저격 글을 올리며 순간의 해방감을 느낀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 쇼핑을 하거나, 매운 음식을 먹거나, 혹은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나드는 불륜을 저지를 때, 대개 이런 증상들엔 반복적인 패턴과 주기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소설이 다루는 파국에 비하면, 우리가 행하는 일탈들은 아주 일상적이고 작은 주이상스(고통을 수반하는 본질적이고 개인적인 쾌락)일 뿐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꽤 충격적이다. 마지막 내용은 스포일러라 여기서 밝힐 수는 없지만, 담담하게 자신의 상처를 응시하며 끝이 난다. 사건이 벌어진 후 마지막이 이 소설의 가장 문학적인 부분이다. 나는 그것을 무의식적 쾌락의 영원한 반복으로 읽었다.

나는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 <데미지> 를 나중에 보았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문학적 잔상이 계속해서 일렁일 때 글을 쓰는 편이다. 이 소설은 챕터마다 장면 전환이 잦아 몰입감이 높고 전개가 매우 흥미진진하다. 겉으로는 마치 통속 소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의식적 심리 기제를 깊숙이 건드리는 작품이다. 

이 소설을 읽고 스포일러 없이 어떻게 함축적인 평을 쓸까 고민하다가 아래와 같이 적었다.

"억압이 금기를 낳고, 금기는 쾌락을 낳는다. 금기가 강할수록 쾌락은 커진다. 금기가 낳은 쾌락은 죄의식을 동반한다. 그리고 죄의식은 다시 억압의 형태를 띤다." (알라딘 100자 서평)

그리고 다시 금기와 쾌락… 반복… 이 잔인한 환유의 고리를 끊으려면 결국 자신의 상처를 정면으로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래서 소설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난 게 아닐까 싶었다.

영화 <데미지>를 본 것은 소설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제레미 아이언스를 보려는 사심이 컸다. 영화에서는 원작과 달리 '스티븐'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있다. 영화라는 매체 특성상 익명으로 남겨둘 수 없으니, 아마 가장 흔한(?) 남자 이름을 붙인 듯하다.

원작 소설이 가진 팽팽한 문학적 표현들이 대거 생략되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쉬웠다. 1992년 특유의 파격적인 베드신들이 시각적 자극을 주긴 하지만(1992년은 샤론 스톤의 <원초적 본능>이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감정의 깊이보다는 행위 묘사에 치중해 살짝 몰입이 깨지는 순간도 있었다. 줄리엣 비노쉬는 당시 28살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보니 30대 중후반처럼 보였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는 굉장히 매력적이었던 기억이 있어, 아무래도 상대 배우의 비주얼 때문에 생긴 편견이 작용한 듯싶다. 

어쨌든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확실히 소설이 훨씬 좋았다는 것. 조세핀 하트 특유의 그 차가우면서도 뜨거운 느낌이 깊은 잔상을 남겼다. 일인칭 화자가 방백 혹은 고백하는 어조로 극을 이끌어가기에 가독성 또한 매우 훌륭해서, 통속소설의 외투에 깊이 있는 문체의 묘미를 즐기고 싶다면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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