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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연님의 서재
  • 간단후쿠
  • 김숨
  • 15,300원 (10%850)
  • 2025-09-12
  • : 3,250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간단후쿠』 김숨 / 민음사


『간단후쿠』는 김숨이 지난 10년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인터뷰하고 써왔던 것들의 체화이다. 10년간 많은 것을 보고 들은 눈과 귀는 많은 글자를 토해내고 싶었을 거다. 그럼에도 그 중 고르고 고른 절제 된 언어로 김숨은 모든 것을 보여준다.

김숨은 요코가 되어, 간단후쿠가 되어, 귀리죽이 되어, 조센삐가 되어, 나를 잊어버리는 병에 걸려 그것 말고는 무엇도 아닌 채로 강물에 편지를 흘려보내고, 집 주소도 없는 편지를 땅에다 쓰고, 지우개 손으로 지평선을 지우고, 돌림노래를 부르고, 수건 떨구기 놀이를 하고, 널뛰기 놀이를 하고, 나나코 되기 놀이를 하며 만주의 바늘 장수를 기다린다. 그러나 결코 개나리가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전쟁이 끝나기만 하면 오토상은, 요코의 집도 모르는 오토상은, 요코의 진짜 이름도 모르는 오토상은, 요코를 개나리의 집으로 돌려보내 준다고 했다.


책을 읽으며 나도 요코가 되어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요코가 감각하는 것을 나도 함께 감각한다. 분절 되어있는 김숨의 시적 언어는 요코를 체화하지 않고서는 쓸 수도, 읽어 낼 수도 없는 글인 것만 같다. 이 정도는 돼야 체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분절, 시상의 연결. 함축적이고 담담한 어조가 모두 시적이어서 더 슬퍼서 나는 책을 다 읽고도 한동안 요코를 놓지 못했다.


목차 역시 돌림노래처럼 옆으로 흐른다. 돌림노래가 끝이 없는 것은 여기가 끝났나 싶으면 저기에서 계속되고, 저기가 끝났나 싶으면 또 여기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 노래는 왜 계속될까. 그 누구도 어디에서 어떻게 끝내야 할지 알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꽃을 따던 소녀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옳게 태어난 남자아이들은 군인이 되고, 옳게 태어난 여자아이들은 조센삐가 되고, 소년들은 소녀들을 ‘세에후쿠(정복)’하고, 무덤이 된 땅은 그들을 품고 다시 꽃을 피운다. 그러나 이러한 유기적 연결은 마치 자연의 섭리인양,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전쟁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전쟁에서 이기기를 바라고, 전쟁통에서 돈 벌기를 원하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그러기 위해서 여자아이들을 팔고, 콩알만 한 참새의 살을 먹는다. ‘불쌍하다’고 말하면서.

이런 순환은 노래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의 꽃->어린 소녀들->젊은 남자들->군인->무덤->꽃의 반복을 연상시킨다. 군인들의 달밤의 줄서기는 동그라미를 그리지 못해 강강술래가 되지 못하지만, 위와 같은 순환은 원을 이루어 강강술래가 된다. 바야흐로 모든 군인이 죽고, 이윽고 전쟁이 끝나야 비소로 끝이 나는 돌림노래와 함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랜 시간 지나.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아주 오래전에.
꽃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린 여자아이들이 모두 꺾어 갔지.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어린 여자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랜 시간 지나.
어린 여자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아주 오래전에.
어린 여자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모두 젊은 남자들에게 갔지.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젊은 남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랜 시간 지나.
젊은 남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아주 오래전에.
젊은 남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모두 군인이 되었지.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군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랜 시간 지나.
군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아주 오래전에.
군인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모두 무덤으로 갔지.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무덤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오랜 시간 지나.
무덤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아주 오래전에.
무덤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모두 꽃이 되었지.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


“무지와 무사유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듣기의 시간은 계속돼야 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직접 듣지 못한다면 적어도 계속 읽기라도 해야 한다. “여전히 곳곳에 있”는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들을 언제 끝내야 하는지 알지 못해 아직도 돌림노래처럼 부르고 있는거라면, 노래 가사처럼, 우리는 “대체 언제쯤 깨달을까(when will they ever learn).”


어스름도 지평선을 덮지 못한다. 밤도 지평선을 지우지 못한다. 눈을 못 뜰 만큼 매서운 바람도 지평선을 날려 버리지 못한다. 폭설도 지평선을 덮지 못한다. 종일 퍼붓는 장맛비도 지평선을 쓸어 버리지 못한다. 한여름 한낮의 해도 지평선을 태우지 못한다. 오줌을 누자마자 고드름이 돼 매달리는 추위도 지평선을 얼리지 못한다.
군인들은 지평선 너머에서 온다. 지평선을 밟고 올라서서 떠밀고 떠밀리며. (p.23)

나는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됐으니까. 군인도 군복을 입고 군인이 된 걸까.

사쿠라코 언니의 남편이 그녀를 판 건 여자애들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읍내 국숫집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나 오토상처럼. 여자애를 사고파는 사람들이 있는 건 여자애들을 ‘세에후쿠’하고 싶어 하는 군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애들을 세에후쿠하는 것은 닭장 속 닭을 세에후쿠하는 것보다 쉽다. 여자애들은 담요 위에 깃털이 뽑힌 닭처럼 누워 있다. 그런데도 군인들은 만주 땅을 세에후쿠한 것처럼 우쭐해한다. (p.162)

군인들이 스즈랑 마당에서 왁자지껄 벌이는 ‘달밤의 줄서기’는 동그라미를 그리지 못해 강강술래가 되지 못한다. (p.44)

군인들은 요시에를 번개처럼 들어 트럭으로 던져졌다. 금방 딴 목화 솜 꽃을 손에 든 그녀가 들어 올려질 때 엄마는 그녀의 발을 재빨리 붙잡았다. 그러나 친척 아저씨가 휘두르는 팔에 떠밀린 엄마는 요시에의 발에서 벗겨진 고무신과 함께 나동그라졌다. 목화 솜꽃 대신 눈발이 날리는 만주에서 요시에를 기다리던 것은 ‘양철 오리 주둥이’를 손에 들고 전봇대처럼 서 있는 간호사였다. (p.59)


몸이 없어지면 몸에서 놓여날 수 있으려나. (p.119)

스즈랑에서는 여자애가 여자애를 때린다. 레이코 언니가 손바닥으로 내 뺨을 때릴 때 그녀의 얼굴은 화가 난 군인의 얼굴 같았다. 기분이 이상하다. 군인에게 맞았을 때보다 덜 아프다. 오토상에게 맞았을 때보다 덜 화가 난다. 그런데 엉엉 소리 내 울고 싶을 만큼 서럽고 슬프다.

레이코 언니에게 양 뺨을 얻어 맞으니 몸을 더 없애고 싶다.
몸이 없으면, 그래서 입이 없으면, 배고픈 것도 모르겠지.
몸이 없으면, 그래서 얼굴이 없으면, 내 얼굴이 엄마 얼굴보다 늙은 것도 모르겠지.
몸이 없으면, 간단후쿠를 입지 않아도 되고 군인들을 데리고 자지 않아도 될 텐데.
몸이 없으면, 트럭으로 기차로 날 던지지 못했을 텐데.
하지만 몸이 없으면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몸 없이 집에 어찌어찌 돌아간다 해도, 내가 돌아온 걸 엄마나 동생들이 모른다. (p.121)

하나코 언니는 본다는 것이 뭔지 모른다. 모르지만 보고 싶다. 보고 싶다는 말을 스즈랑의 어떤 여자애보다 많이 한다.
스즈랑의 여자애가 되고 그녀는 엄마가 보고 싶다. 아버지와 동생들이 보고 싶다. 스즈랑의 여자애가 되기 전까지 그녀는 하늘, 나무, 구름, 치자처럼 향기 나는 꽃, 나비, 눈송이, 까치, 참새...... 그런 것들이 보고 싶었다.
그녀가 고향 집에서 중얼거리던 ‘보고 싶어.’와 스즈랑에서 중얼거리는 ‘보고 싶어.’는 다른 말이다. 앞의 ‘보고 싶어.’에는 눈이 멀어 태어났다는 슬픔이 깃들어 있다. 뒤의 ‘보고 싶어.’에는 살아서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담겨 있다. (p.131)


전투에서 여러 번 살아 돌아온 군인의 모습이 전쟁의 모습일까.
단골처럼 나를 찾아오던 군인이 있었다.
처음 날 찾아왔을 때 그 군인은 지나가다 ‘길을 물으려’ 내 방에 든 사람처럼 굴었다. 쑥스러워하며 꾸벅 인사를 해 온 뒤 공손히 내 몸에 다녀갔다.
두 번째 찾아왔을 때는 ‘지나가다 목이 몹시 말라 냉수를 한 잔 얻어 마시러’ 내 방에 든 사람 같았다.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황급히 내 몸에 다녀갔다.
세 번째 찾아왔을 때는 ‘도둑맞은 닭이나 염소를 되찾으러’ 내 방에 든 사람 같았다. 내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내 몸에 다녀갔다.
한참이 지나 다시 찾아온 군인은 내가 ‘바람나 자식새끼를 내팽개치고 집 나간 마누라’라도 되는 듯 날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
나도 전쟁의 모습일까. (p.142)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러 집을 떠나기 전이었다. 어린 자식들이 분홍빛 입을 한껏 벌리고 배고프다고 배고프다고 배고파 죽겠다고 징징거리자, 아버지는 부엌으로 들어가 광주리를 가지고 나왔다. 싸릿대로 짠 광주리에 실을 잇고, 광주리 밑에 보리쌀 여남은 알을 놓아두고 참새를 기다렷다. 참새가 보리쌀을 먹으려 날아들자 재빠르게 실을 놓았다. 실에 강겨져 하현달처럼 떠 있던 광주리가 땅에 떨어지며 참새가 그 안에 갇혔다. 광주리를 덫 삼고 보리쌀을 미끼삼아 잡은 참새 네 마리를 아버지는 한 마리 한 마리 모가지를 비틀어 죽였다. 두 다리를 쭉 뻗고 죽은 참새들을 팓대에 놓은 불에 구워 자식들 손에 들려주었다. 나는 참새의 다리에 붙어 있던 콩알만 한 살점을 떼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으며 훌쩍거렸다. 참새가 불쌍해서. (p.260)

오토상은 내가 계속 군인을 데리고 자게 한다. 열에 둘은 내가 아기 가진 걸 모르고 달려든다. 열에 셋은 내 부른 배를 보고는 재수 없어 하며 나가 버린다. 열에 넷은 화를 내며 내 발이나 종아리에 발길질을 한다. “가와이소다(불쌍하네).”
가와이소다는 나쁜 말이다. 그건 아리가토고자이마스보다 훨씬 나쁜 말이다. (p.263)

작가의 말
무지와 무사유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듣기의 시간은 계속돼야 한다. 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누군가의 ‘있음’에 아지랑이만 한 상처라도 남기는 일이 없도록. (p.290)

반복되는 전쟁과 폭력과 학살. 간단후쿠를 입고 간단후쿠가 된 소녀들은 여전히 곳곳에 있다. 우리가 보고 있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을 뿐.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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