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옳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레프 톨스토이 저, ‘부활’을 다시 읽고
5년 만에 톨스토이의 '부활'을 다시 읽으며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내 관점의 변화다. 초독 땐 줄거리까지 요약하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의도를 간파하고 메시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재독 땐 그런 모습이 썰물처럼 빠져버리고 냉철한 비판주의적인 시선만 남았다. 톨스토이가 도덕과 윤리 선생으로 보였고, 교조주의적이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엘리트 귀족 노인의 이미지로 느껴졌다. 그리고 때론 작가의 신상으로부터 독립적인 작품 감상이 그 작품에 대한 이미지를 끝까지 곱게 가질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도 다시 깨닫게 되었다.
초독 때 내 시선은 네흘류도프 공작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그의 내적인 변화와 그것에 이은 외적인 변화의 과정을 찬찬히 목도하면서 이 작품의 제목이 왜 '부활'로 지어졌는지 감동을 느끼며 확인할 수 있었다. 부활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네흘류도프는 정신적인 면에서 부활을 경험한다.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아무도 고발하지 않지만 자기가 스스로를 고발하여) 현재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으며 회심을 실제 삶으로 보여주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아,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인가!
톨스토이의 의도는 네흘류도프 개인의 거듭남에 그치지 않았다. 이 노년의 대문호는 정치, 사회, 종교 내에 뿌리 깊이 박힌 고질적인 문제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폭로했다. 나는 러시아 제국 시대의 여러 부패된 모습들에 공감 아닌 공감을 하는 동시에, 이런 것들 때문에 한 아름다운 인간의 거듭남이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사실에 마음 아파했다. 제아무리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반성과 회개를 통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용기를 낸다 하더라도 다양한 사회구조적인 문제들로 인해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건 결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네흘류도프를 응원했다. 또한 나를 네흘류도프에 이입시키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때 겪어야 할 갖은 고초를 미리 예감하며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그 길만이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나는 진지했고 이 책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읽을 땐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두 번 들으면 식상해지는 조언이 있기 마련이다. 톨스토이의 의도와 메시지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뭐랄까, 개연성이랄까, 현실 가능성이랄까 하는 점이 이번엔 유난히 내게 크게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나는 네흘류도프의 변화에 더 이상 순수하게 초점을 맞출 수 없었다. 네흘류도프가 아닌 네흘류도프를 만든 톨스토이가 더 크게 보였다고나 할까. 또한 톨스토이의 지극히 계산된 소설 속 설정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의도적으로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너무나 교과서적으로) 느껴져서 800 페이지가 넘는 그의 세세하고 다양한 문제 보고서들에 마음을 담아 집중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모든 걸 도덕과 윤리로 환원하여 개혁하려는 그의 교조주의적인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이 작품을 두 번 읽는 나는 예전처럼 순수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마치 기독교가 도덕과 윤리의 종교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느껴졌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건 양심의 목소리가 된다. 네흘류도프는 그 양심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삶으로의 회심을 경험하게 되지만, 과연 그와 같은 사례가 얼마나 현실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네흘류도프의 회심 과정은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공동체와 단절된 개인이란 생각할 수 없는데, 네흘류도프는 오로지 양심의 목소리에 따라 스스로 회개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너무 옳았다. 그래서 만약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아무도 그를 도와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그가 너무 옳았기 때문에 공동체와 시스템의 중요성이 가려지는 현상이 발생했고, 마치 혼자서도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충분히 거듭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과연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는 원인이 의지의 부족 때문인가?
내가 아는 인간은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여러 가지 상황과 조건 때문에 그것을 따르지 못하는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인간의 나약함을 다르게 보는 것 같았다. 도덕과 윤리 선생으로서 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느냐고 비난 섞인 목소리로 우리에게 묻는 것 같았다. 마치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네흘류도프처럼 될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한 관점이 상이한 상태로 톨스토이는 곧장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폭력을 사용하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타자를 심판하지 말라고 말이다. 이 작품 속에서 여러 사회제도와 정치제도, 사법시스템과 형벌제의 문제점을 폭로하는 것도 다 이런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 하지 말라고 한 걸 계속하느냐고 힐난하는 톨스토이의 목소리가 책을 덮고 나서도 내 귀에 단조롭게 계속해서 울려댔다.
톨스토이는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는 개인과 사회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왜 외면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찰은 부족했던 것 같다. 말년에 스스로 회심하고 거듭난 톨스토이의 꼬장꼬장하고 너~무 옳기만 한 모습이 보이고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빨간 모자를 쓴 교관의 이미지도 겹쳐진다. 나는 부담을 느낀다. 내가 이해받지 못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그럼에도 그는 너무나도 옳아 보인다. 전혀 주저함이 없고 확신에 가득 차 있다. 아, 이 모순적인 상황이란!
작품 마지막에 산상수훈이 등장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이 떠올랐다. 톨스토이의 달라스 윌라드의 산상수훈에 대한 입장의 차이가 현저하게 크다는 사실이 깨달아졌다. 시간이 나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모략'을 들춰봐야겠다. 마음의 정화가 필요하다.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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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250
5. 부활: https://rtmodel.tistory.com/1336
6. 하지 무라트: https://rtmodel.tistory.com/1902
* 톨스토이 다시 읽기
1. 부활: https://rtmodel.tistory.com/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