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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woong Kim님의 서재
  • 남아 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 11,700원 (10%650)
  • 2010-09-17
  • : 11,353

살아남은 자의 몫


가즈오 이시구로 저, '남아 있는 나날'을 다시 읽고


밤늦게 책을 덮고 먹먹한 심정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어두워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스탠드 불빛에 비친 내 모습만이 흐릿하게 어려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을 훑을 수 있었다. 놀라운 건 그게 내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나처럼 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어떻게 해도 완독 후 내 감정을 텍스트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을 테지만, 긴 잠을 자고 깨어난 듯한 기분이었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이런 책들을 사랑한다. 읽고 나서 어떻게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지는 책. 책이 던져주는 무언의 아우라가 나를 가뿐히 압도하여 나로 하여금 스스로 내 껍질을 뚫고 나오게 만드는 책. 그리고 내가 살지 않은 인생, 그러나 마치 내가 산 것 같은 인생을 맛볼 수 있는 책. 이런 소설이 아니면 어떻게 내가 나와 무관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을까. 소설은 타자의 인생을 읽다가 어느새 나의 인생 중심으로 곧장 진입하게 만드는 웜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나의 인생을 한 걸음 떨어져 조망하며 내게 주어진 현재의 삶을 조금 더 깊고 풍성하게 가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절한 이야기 선생님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마지막 장에 다다라서야 마침내 작품 중심을 관통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으며, 동시에 제목의 의미가 단박에 이해되는 소설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바닷가 마을 웨이머스 선창에서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곧 빛을 발할 저녁 시간을 기다리며 웅성거리고 있는 인파 한가운데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나는 주인공 스티븐스 집사와 5미터 정도 떨어져 사그라드는 박명에 경계가 희미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 이미 저녁을 맞이한 그의 육체를 뒤에서 바라보는 나는 애잔함을 느낀다. 해가 저물 때 느껴지는 특유의 정서 때문만은 아니다. 마지막 장에 다다르기까지 그가 줄곧 회상했던 과거의 복잡 미묘한 추억들 때문도, 켄턴 양을 직접 만나고 확인한 그녀의 상황이 그의 예상과 달라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그가 곱씹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아마도 나는 그런 스티븐스 집사의 축 처진 어깨에서 나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지나가버린 내 과거에 대한 깊은 한숨 어린 회한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구차할 정도로 먼저 내놓게 되는 내 과거 행위들에 대한 이런저런 변명과 합리화들, 그리고 그러는 가운데 스스로 느끼는 나의 이율배반성과 모순됨이 영사기가 돌아가듯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형형색색의 전구들이 켜지는 바로 그 시간, 그 황홀한 마법 같은 시간,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스티븐스 집사와 하나가 되었다.


스티븐스 집사가 홀로 떠난 자동차 여행의 외형적 목적은 지극히 공적인 차원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최근 스티븐스는 주인이 바뀐 달링턴 홀 운영 중 발생한 자잘한 문제점들의 원인이 인원 부족이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예전에 달링턴 홀에서 총무로 완벽한 임무를 수행하다가 결혼 때문에 떠났던 켄턴 양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을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마침 얼마 전 켄턴 양으로부터 편지가 배달되었고, 스티븐스 집사의 눈에 그 편지는 켄턴 양이 마치 현재 결혼 생활에서 불행을 느끼는 동시에 옛날을 그리워하는 듯해 보였고, 다시 달링턴 홀에서 일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충분히 착각일 수 있고, 또 충분히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는, 미묘한 뉘앙스를 읽어내기까지 했었다. 여행을 빌미로 켄턴 양을 직접 방문하여 그녀의 의중을 묻고 자신이 생각해 낸 해결책이 실현 가능한 것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의 외형적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켄턴 양은 나름대로의 지난한 과정 끝에 마침내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달링턴 홀로 갈 수도, 갈 필요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스티븐스의 여행을 실패라고 할 수 없는 까닭은 이 여행의 진짜 목적은 제목에서 드러난 것처럼 스티븐스 자신에게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작은 소망의 씨앗을 손에 넣게 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스티븐스가 일주일간의 자동차 여행에서 얻은 것은 켄턴 양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과거가 아닌 미래였다. 켄턴 양이 합류하지 못하게 된 것은 스티븐스 집사의 합리적인 계획과 사적인 미련이 좌절되는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회환과 변명과 합리화를 치열하게 거친 그에게는 더 이상 자신의 눈을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에 두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스티븐스 집사는 이번 여행 덕에 비로소 과거의 연장이 아닌 새로운 미래를 두 팔 벌려 맞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여행 중 시종일관 '위대한 집사'란 무엇인지, '품위'란 무엇인지 묻고 스스로 답하는 지난한 여정을 거쳤다. 나치에 부역한 셈이 되어버린 달링턴 경의 몰락 과정을 한 순간도 빠짐없이 바로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스티븐스는 집사라는 직분에 자신이 얼마나 합당했는지를 묻고 또 물었다. 그러나 그가 묻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그건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위대함에 대한 것이었다. 요컨대 그는 위대한 집사로서 품위를 지켰다고 볼 수는 있으나 그것보다 더 근원적으로 보이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는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다. 달링턴 경의 충견이었던 그는 해적선에서 가장 성실한 해적이었고, 자신의 충직함으로 결국 나치에 부역하는 꼴이 되어버려 한나 아렌트로부터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도출하게 만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같은 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사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할 줄 아는 품위, 자신이 몸담은 직장이 불의를 행하는 곳인지 따져볼 줄 아는 품위, 그리고 아무리 상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옳지 못한 것이라면 스스로의 냉철한 판단으로 거절할 수 있는 소신과 용기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품위 말이다. 그가 자꾸만 자신이 위대한 집사였다는 것에 집착하는 것도 그가 이미 스스로 더 중요한 차원의 품위를 지켜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인지했으나 그것을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아 행한 변명과 합리화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 지나간 일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그렇게 흘러갔지만 스티븐스는 어쨌거나 살아남아 자신의 불명예스러운 과거를 돌이켜보며 반성과 성찰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앞에는 인생에서 가장 좋고 기다려지는 저녁 시간이 놓여 있다. 모든 게 만족스럽고 떳떳한 과거를 지닌 사람이 우리 주위엔 과연 얼마나 될까. 한때 가졌던 투철한 신념도,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신봉했던 사상도 모두 지나가버린 과거에 속하게 된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모순되고 이율배반 투성인 우리의 삶을 그러나 우린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남아 있는 나날을 가장 좋은 시간으로 만드는 것.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스티븐스의 앞길을 응원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의 앞길도. 이왕이면 유머와 농담을 동반하면서. 


#민음사 

#김영웅의책과일상 


* 가즈오 이시구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rtmodel.tistory.com/855

2. 클라라와 태양: https://rtmodel.tistory.com/1308

3. 나를 보내지 마: https://rtmodel.tistory.com/1318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https://rtmodel.tistory.com/1354

5. 창백한 언덕 풍경: https://rtmodel.tistory.com/1359

6. 우리가 고아였을 때: https://rtmodel.tistory.com/1368

7. 나의 20세기 저녁과 작은 전환점들: https://rtmodel.tistory.com/1369

8.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86

9. 파묻힌 거인: https://rtmodel.tistory.com/1433

10. 녹턴: https://rtmodel.tistory.com/1457


* 가즈오 이시구로 다시 읽기

1. 남아 있는 나날: https://rtmodel.tistory.com/2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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