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으로 숨길 수 없는 정체성
줌파 라히리 저, '책이 입은 옷'을 읽고
퓰리처상을 수상했던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이자 미국 이민자로서 평생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전성기를 누리던 2012년, 그녀는 돌연 이탈리아 로마에서 2년간 거주하며 벵골어도 영어도 아닌 이탈리아어로 읽고 쓰고 말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 책은 이탈리아어로 탄생한 그녀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이탈리아어로 쓴 첫 번째 산문집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책은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 '책이 입은 옷'은 말 그대로 책의 표지를 뜻하지만 단순히 표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옷 때문에 정체성의 혼란이 가중되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으로 이민 후 다른 미국 아이들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옷 때문에 더더욱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 책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평생을 벵골 고유 의상만을 고집했던 어머니와의 갈등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아마도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정체성 때문에 여러모로 마음의 상처가 깊었던 것 같다. 그녀는 콜카타에서 사촌들이 입는 교복을 부러워하기도 했다고 쓴다. 교복은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동시에 익명성을 보장하는 이중 효과를 내는데, 그녀는 바로 그것의 혜택을 누리길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는 교복이란 제도가 없었고, 각자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쓴다. "나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것, 이 자유가 싫었다."
줌파 라히리는 어릴 적 옷으로 인한 갈등과 스트레스 때문에 옷이 옷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통찰을 책의 표지에 적용한 글이 바로 이 책이다. 표지는 내용을 보호하고 담아내고 전달해야 하는 고유한 사명을 띠지만,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때론 표지는 내용과 독립적인 가치를 띠고 책의 상품성을 좌우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내용이 말하는 것을 말해야 하는 표지의 정체성은 내용과 별개의 무엇인가를 말하는 정체성까지 띠게 되는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줌파 라히리가 어릴 적 옷 때문에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표지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줌파 라히리는 기본적으로는 발가벗은 책, 즉 표지가 표지만의 개성을 내뿜지 않고 아무런 포장 역할을 하지 않는 책, 그 어떤 보조 설명도 덧붙여지지 않은 채로 텍스트의 신비를 그대로 전달하는 책이야말로 텍스트와 독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물론 표지의 상업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대두된 21세기 현재에는 불가능한 바람으로 그치게 되지만 말이다.
나 역시 내 책의 표지들이 모두 맘에 든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표지에 적극적으로 가담할 수 있는 시스템도 아니고, 설사 그럴 자격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그 방면으로 아는 지식이 미천하기에 내가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책의 표지는 디자이너와의 만남이 잘 이루어지길 기도하는 마음으로만 대체된다. 표지의 중요성을 알지만, 저자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상적이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표지와 상관없이 텍스트만으로 그 책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독자들이 존재할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표지가 그 효과를 증폭시킬 수 있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내용을 깎아먹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표지로 독자들을 낚는 상업주의는 작가로서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이다. 저자나 작가는 이런 것들에 적당히 무심할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한다. 또한 책의 진정한 정체성은 텍스트에 있지 표지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 같은 발가벗은 책이 진정한 책의 정체성과 더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마음산책
#김영웅의책과일상
* 줌파 라히리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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