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감각, 피안과 차안의 합일: 단일성과 현재성에 대하여
헤르만 헤세 저, '싯다르타'를 다시 읽고
비록 ‘싯다르타’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 먼저 쓰였지만, 초독 때와 달리 이번엔 의도적으로 나중에 읽은 까닭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이루지 못한 공백을 '싯다르타'가 충실하게 메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나르치스가 이성, 머리, 정신, 학문을 대변한다면, 골드문트는 감성, 가슴, 육체, 예술을 대변한다. 이 양극은 작품 마지막에 가서도 좁혀지지 않는다. 양극이 서로 다른 개인으로 발현되어 있다는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싯다르타'에서는 이것이 이루어진다. 마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싯다르타 한 개인 안에서 합일을 이룬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를 '사유와 감각의 합일'이라고 해석했다.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하다.
헤세를 다시 읽으며 여실하게 느끼는 건 헤세는 인간의 대립된 두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그 두 자아의 합일을 강렬하게 욕망했다는 점이다. '데미안'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이런 모습은 그 이후에 쓰인 모든 작품 속에 충실히 반영된다. 합일을 욕망하기 위해서는 서로 조금도 섞이지 않는 선명한 양극이 전제되어야 한다. 양극이 선명할수록 합일은 요원해지기 마련이고, 선명한 양극은 이분법적으로 나눠지기에 현실적이기보다는 이상적이고 실험적인 모델로 비치기도 하지만, 헤세는 그의 작품 속에서 이를 해내려고 고군분투한다.
'데미안'에서는 데미안을 만나기 전과 후의 싱클레어가 서로 대립한다. 대립하는 두 자아가 싱클레어라는 한 개인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에 우린 '데미안'을 싱클레어의 성장기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이 성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반적인 성장소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그러니까 특정한 방향성이 없는 성숙화 과정이 아닌, 싱클레어에서 출발하여 데미안으로 향하는, 다시 말해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편, '황야의 늑대'에서는 사회에 길들여진 시민의 자아와 길들여지지 않은 채 자기만의 자유로운 개성을 갈구하는 늑대의 자아가 서로 대립한다. '데미안'과 달리 '황야의 늑대'는 하리 할러의 성장소설로 읽을 수 없다. 싱클레어에겐 데미안이라는 목적지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하리 할러에겐 특정한 목적지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이 작품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어 깊이 통찰하고 드러낸 '현대인의 내면 보고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모든 독자는 하리 할러로부터 동질감을 느끼면서 자기 안에 꿈틀대는 늑대를 자각하고, 동시에 그 늑대를 억누르며 사회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시민을 인지하게 된다.
양극이 한 개인 안에 발현된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보다는 '데미안'과 '황야의 늑대'와 닮아 있다. 출간 순서를 따져 볼 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가장 나중에 쓰였다는 점만 보아도 헤세는 한 개인 안에서의 대립된 두 자아를 '데미안', '싯다르타', '황야의 늑대'를 통해 먼저 보여주고, 가장 나중에 두 자아가 두 개인으로 존재할 수도 있음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보여준 게 아닌가 싶다. 또한 맨 앞의 두 작품,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는 싱클레어와 싯다르타가 내면에 존재하는 양극의 합일을 추구하고 결국 완성을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쓰인 '황야의 늑대'에서는 양극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합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혼재되어 있을 뿐이다. 구하며 끝내 성장을 이뤄내는 반면, ‘황야의 늑대’에서 하리 할러는 합일을 추구하나 이뤄내지 못한 채 한계를 보여준다. 이 하강 현상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정점을 찍는다. 두 자아는 마치 처음부터 합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한쪽으로 치우친다 하더라도 마치 저마다의 개성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서로 다른 인격체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 이뤄진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통한 합일이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로 진행하면서 점차 희미해진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합일에 대한 헤세의 강렬한 욕망이 결코 약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데미안’과 ‘싯다르타’에서의 합일을 이뤄가는 과정이 다분히 이상적이었기에 현실성과 다양성을 반영하면서 ‘황야의 늑대’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탄생시킨 거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헤세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그의 모든 전작들이 집대성된 대작으로 여겨지는 ’유리알 유희’에서 우리는 합일을 향한 헤세의 염원을 재확인할 수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이 작품 ’싯다르타’는 나르치스로 생을 시작했던 싯다르타가 골드문트의 세계를 직접 체험한 뒤 두 세계의 합일을 이뤄내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각각 사유와 감각을 상징하는 두 세계를 싯다르타는 그 어떤 인간 스승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깨닫고(사유) 경험하며(감각) 융합하여 하나의 단일성으로 해석하기에 이른다. 인생 전체라는 긴 여정을 통해 이뤄낸 숙원이었다.
싯다르타가 이룬 합일에서 고찰할 수 있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스승과 제자가 되어 이뤄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위대한 세존 고타마도 해내지 못했던, 영원하고 통일적인 세계 법칙의 전체 구조를 설명하는 단일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가르치고 배워서 진리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싯다르타는 '데미안‘의 싱클레어보다 한 단계 더 급진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싱클레어에게는 데미안이라는 가시적인 목적지가 있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명징한 푯대였고 스승이었다. ’데미안‘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는 여정’이라고 읽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싯다르타‘에서 싯다르타에게는 그런 가시적인 푯대 혹은 스승으로 해석될 인격체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스승과 제자가 되어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사문의 행렬을 따르기 전부터 어렴풋하게나마 이를 알고 있었던 듯하다. 많은 성스러운 제사와 목욕재계, 가르침, 논쟁, 명상, 침잠을 익혔지만 싯다르타는 자아로, 자기 자신에게로, 아트만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많은 현인들, 지혜로운 브라만들은 있었으나, 그들은 심오한 지식을 알고 있었을 뿐, 삶 속에서 체득한 적은 없었다. 그들 역시 구도자일 뿐이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그 원천, 자신의 자아 속에 있는 그 원천을 찾아내야 하고, 바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밖의 모든 것은 탐색의 길이거나 돌아가는 길이거나 또는 방황하는 미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심지어 위대한 스승을 두고 따르는 것조차도.
싯다르타는 사문이 되어 몰아와 침잠을 더 익히고 고행과 단식과 사색에 몰입해 보았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고야 마는 윤회의 고뇌를 피할 수 없었다. 자아로부터 벗어나 경이의 세계와 접하여 마음의 안식을 얻고 싶었지만 사문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간파해 냈다. 사문의 방식은 의식을 마비시켜 자아로부터 잠시 도망치는 것일 뿐이었다. 그건 창녀가 있는 거리의 술집에서나, 마부나 노름꾼한테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 사문의 끊임없는 단식과 고행은 여인숙에서 잠든 소몰이꾼의 막걸리 몇 잔으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싯다르타는 눈에 보이는 방식은 현저히 다르나 본질은 말초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무엇을 해도 다시 자아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싯다르타는 스스로 깨우쳤다.
‘스승은 없다, 스스로만이 스스로에게 참 스승이 될 수 있다’라는 깨달음은 싯다르타가 세존 고타마를 대면한 이후 확신으로 바뀐다. 고타마는 세계를 하나의 단일성으로 설명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해탈에 관한 부분에서는 유일하게 균열을 내었다. 결국 해탈은 단일성으로 통일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을 극복해야 한다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해탈을 말할 땐 어쩔 수 없이 차안과 피안의 구분을 초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싯다르타가 보기에 고타마는 해탈에 이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에 이르는 방법은 고타마조차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는 작품 마지막 부분에서 싯다르타의 입을 통해 정리되어 말해진다.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이다. 말로 표현된 진리는 반쪽일 수밖에 없다고, 반쪽 짜리 진리는 전체성, 완전성, 단일성을 담아낼 수 없다고 말이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정면으로 마주한 뒤에나 깨달을 수 있는 진리였다.
고마타도 설명할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었던 진리는 차안이나 피안, 그 어느 한쪽에만 속하는 게 아니었다. 단일성, 완전성, 전체성이 온전히 담기기 위해서는 그 어떤 구분도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사유나 감각도 분리가 되면 안 되었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구분도 없어야 했다. 싯다르타는 이 일련의 깨달음을 고타마와 고빈다와 헤어진 이후 스스로의 길을 걸으면서 얻게 된다.
고타마와 헤어진 후 새롭게 태어난 싯다르타는 카말라를 매개로 하여 그동안 살아왔던 사유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감각적인 세계를 오랜 기간 경험하면서 사유와 감각의 세계 모두를 인정하게 되었고, 거추장스럽고 거짓으로만 보았던 차안의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피안과 차안의 구분, 사유와 감각의 구분을 초월하여 마침내 합일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스스로의 힘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싯다르타는 감각의 세계에서 너무 물들어버린 자신이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세계로부터 뛰쳐나와 강에서 자살까지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옴의 소리를 들으며 싯다르타는 제2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로부터, 강물로부터 배우며 시간이란 개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강물은 흐르고 또 흐르고 끊임없이 흐르지만, 언제나 그곳에 존재한다. 언제 어느 때나 똑같은 모습이면서도 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을 띤다. 강물은 아래를 향해 나아가고, 가라앉고, 깊이를 추구하며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물에는 현재만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에게는 이분법적인 것들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간이라는 마지막 경계마저도 무너지게 되었다. 모든 것이 단일성으로 현재성으로 빛나게 보이는 단계에 접어든 것이었다.
또한 싯다르타는 카말라로부터 얻은 아들에게서 버림을 받으면서 자식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이 일종의 번뇌요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란 사실을, 윤회이자 슬픔의 원천이자 시커먼 강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필수 불가결한 것이며 자신의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 싯다르타는 과거엔 덧없어만 보였던 인간의 일상적 삶들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덜 현명하고 덜 오만해지면서,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일상에 공감하는 마음도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깃든 사랑을 알게 된다. 그는 그들을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그들 각각의 열정과 행위들에서 생명, 생동감, 불멸의 브라만을 보았다. 그는 인간이 그런 맹목적인 성실성과 힘과 강인함을 지녔기에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고 경탄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혜는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단일성을 느끼고 빨아들일 수 있는 마음 자세이자 능력, 그럴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술이었던 것이다. 진리는 단일성과 현재성의 모습으로 지금, 여기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성을 뜻하는 옴의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마지막 꼭지에서 늙은 뱃사공 싯다르타는 여전히 깨달음만을 추구하고 있는 고빈다와 재회한다. 고빈다에게 건네는 조언에서 우린 싯다르타가 깨달은 진액을 맛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나는 이 세계는 불완전한 것도 아니고 완성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는 도중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싯다르타의 말, 그리고 이 세계는 매 순간 완성의 경지에 있다는 말에 밑줄을 진하게 그었다. 돌멩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오늘 내게 돌멩이로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돌멩이가 사랑스럽다는 말에도 마찬가지로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단일성과 현재성으로 압축될 수 있는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책을 덮은 지금도 자꾸 생각이 난다. 비로소 세상을 깔보지 않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싯다르타의 고백이 지금도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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