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나르치스
헤르만 헤세 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읽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다시 읽으면서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나는 이제 이 작품으로 감동을 받을 만큼 순수하지 않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 긋고 되새김질을 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했다는 것. 재밌는 건 초독 때 밑줄 그었던 부분 중 팔 할 정도는 이번에 밑줄을 긋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인데, 주로 이 작품의 주제 혹은 헤세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아 발견 및 실현 혹은 개성화에 관련된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다시 읽으면서 새롭게 밑줄 그은 곳도 있었다. 주로 수려한 문학적 표현이 담긴 문장들이었다. 초독과 재독 사이의 7년이라는 기간은 그만큼 이 작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 변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또한 독자로만 읽다가 작가로도 읽게 되는 전환이 아마도 가장 큰 차이를 낸 것 같다. 한 가지 더, 이 차이 뒤에 숨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인으로 나는 그동안 도스토옙스키 주요 작품들을 두세 번씩 읽으며 인간의 이율배반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켜켜이 누적된 시간들의 무게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인지 헤세가 그려내는 이분법적 자아의 분열 양상과 합일로 나아가는 점진적인 구도로부터 나는 예전에 느꼈던 무구한 감동보다는 의외의 순진성과 단순성을, 그리고 그 결과로 도출되는 비현실적인 낭만성 혹은 관념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7년 전의 나에겐 나라는 껍질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알람과도 같았다는 점을 상기할 때, 나는 한 사람의 정신적인 성장과 성숙 혹은 타성에 젖게 하는 세월의 강력한 힘을 통감하게 된다.
이 작품 감상을 나누기 위해 나는 ‘데미안’을 소환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데미안’을 싱클레어가 데미안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라고 해석할 때,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목적지이자 이상과도 같은 의미다. 싱클레어와 데미안은 단 한 번도 동등한 적이 없었다. 작품 마지막, 병실에서 사라진 데미안의 빈자리와 싱클레어 자신의 모습을 번갈아 보면서 마침내 목적지에 당도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데미안은 어른인지 아이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정도의 신비감을 머금은 채 언제나 싱클레어보다 몇 발 앞서 있을 정도로 우월한 존재였다. 물론 데미안의 우월성은 '데미안'을 에고의 껍질을 깨고 셀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한 인간 내면의 여정을 싱클레어와 데미안이라는 두 인물로 형상화하여 그려낸 작품이라고 해석할 때 비로소 철학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도 데미안과 비슷하게 신비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어떤 특정한 사람은 아니다. 골드문트가 정의하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의 문장들로 표현된다. “진정으로 숭고한, 마법을 부린 듯한 훌륭한 솜씨뿐만 아니라 영원한 비밀로 가득 차 있는 예술 작품은, 예를 들어 스승의 성모 마리아 상 같은 작품은, 모두가 위험한 이중성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즉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충동적인 것과 순수한 정신적인 것이 함께 담겨 있었다. 그렇지만 언젠가 자신이 어머니 이브 상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작품이야말로 그러한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리라.” 골드문트 역시 싱클레어처럼 양극성이라 할 수 있는 이중성을 모두 겸비한 어떤 이상형을 향해 걸어가는 인물인 것이다. 또한 골드문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한다. “꿈과 최고의 예술 작품의 공통점은 바로 신비였다. 내가 사랑하고, 그 흔적을 찾고 있는 것은 바로 신비이다.” 뿐만 아니다. “자신은 계속 어머니를 따라가야 했다. 어머니가 자신의 별이자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결단의 순간이 목전에 다가오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예술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 그것은 운명이나 목표는 아니었다. 그가 따라야 할 것은 예술이 아니라 어머니의 부름이었다.” 즉, 골드문트가 지향하는 것은 그의 꿈이자 신비였고, 또 어머니(생물학적 어머니를 넘어서는 총체적인 이미지)였다.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예술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도 있는 어떤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그 무엇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나는 나르치스의 존재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르치스와 데미안이 서로 다른 존재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의 목적지이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목적지가 아닌 여집합이라는 것. 이는 거꾸로 보아도 진실이다. 나르치스에게도 골드문트의 본성은 자신이 잃어버린 반쪽이었기 때문이다. 즉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한 운명을 짊어졌을 뿐 동등한 존재였다. 이것이 데미안과 싱클레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 두 관계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고, 헤세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가 녹아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것은 ‘데미안’에서 미처 그려내지 못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의미도 가진다. 나르치스에 상응하는 인물은 ‘데미안’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르치스가 어둡고 여윈 편이라면, 골드문트는 밝고 화려하게 빛나는 편이다. 나르치스가 사변가이자 분석가라면, 골드문트는 몽상가이며 아이처럼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다. 나르치스의 세상이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골드문트의 세상은 영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르치스가 냉철할 정도로 정확하고, 이성과 정신성을 대변하는 타고난 학자라면, 골드문트는 본능적일 정도로 야생적이고, 감성과 육체성을 대변하는 타고난 예술가로 그려진다. 이러한 명징한 이분법으로부터 우리는 헤세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다. 헤세는 이 작품 속에서도 사상과 예술로 표현되는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작가로서 헤세의 사명이기도 했다.
요컨대 ‘데미안’이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아 발견 및 자아실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골드문트가 나르치스가 아닌, 나르치스를 충분히 포용하면서도 나르치스로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압도적이고 더욱 근원적이며 총체적인 진리를 향해 다가가는 과정을 통해 자아실현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한편, 나르치스를 세상에서 인정하는 유력자의 전형적인 인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해석에 비추어 보면, 골드문트는 비주류에서 탄생하는 천재적인 예술가를 상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현실에서 나르치스 같은 인물들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반면, 골드문트 같은 인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듯해 보인다. 아마도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혹은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발현할 기회를 맞이하지 못한 채 사그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골드문트 같은 인물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피라미드 구조는 야생동물을 가둔 조그만 우리처럼 숨 쉬기조차 어려운 공간임에 틀림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나는 나르치스의 존재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헤세도 아마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을 떠난 이후 오랜 시간이 흘러 골드문트가 나르치스와 재회하게 된 순간이 바로 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골드문트는 간통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할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때 구원처럼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르치스였다. 만약 이 일촉즉발의 순간에 나르치스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골드문트는 그저 예술 작품 몇 개 남기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을 터였다. 나는 이 극적인 순간으로부터 작가 헤세의 의도를 나름대로 읽을 수 있었다. 골드문트의 길들여지지 않는 예술가적인 방식으로의 자아실현은 나르치스처럼 길들여진 제도권 안에 속한 유력자의 도움 없이는 꽃피우기 힘들다는 것. 아마도 헤세는 이 점을 넌지시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나르치스 덕분에 구사일생을 경험한 골드문트 덕에 나르치스 자신도 더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모습이 작품 마지막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모든 게 무결해 보이는 나르치스가 죽어가는 골드문트 면전에서 자신의 결핍을 깨닫고 인정하는 장면에서 극에 달한다. "내 경우는 다르네. 내 삶에는 사랑이 빈곤했네. 인생에서 최고의 것이 결여된 셈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다면, 그건 다 자네 덕분이네. 나는 자네는 사랑할 수 있었네." 아마도 이 문장 때문에 이 작품의 한국어 번역본 제목이 '지와 사랑'으로도 나오지 않았나 싶다. 이성과 믿음, 이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한 나르치스에게 유일한 결핍이 사랑이었다는 건 하나의 아이러니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골드문트의 모든 삶을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압축할 수 있는 이유도 된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나르치스의 위대함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결핍을 진심으로 깨닫고 인정하는 지고의 겸손을 보였다는 것이다. 자신의 개성을 인지하고 발현하는 것은 자신의 장점과 강점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방식만이 아니라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솔직하게 수용하고 끌어안는 방식도 경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이 장면에서 헤세는 우리에게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각자가 스스로 발견하고 발현시킨 개성이 서로에게 정직한 거울이 되어 서로가 자아실현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다. 서로의 반쪽이 결국 합일을 이루도록 돕는 아름다운 장면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유의미한 깨달음이 내게 끼치는 영향력은 예전과 달리 강력하지 않음을 느낀다. 이미 나는 헤세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어느 정도 성취했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나이가 든 나머지 많은 것들에서 무감각해져 버린 탓일까? 나는 전자이길 바라지만, 후자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 헤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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