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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woong Kim님의 서재
  • 악마와 함께 춤을
  • 크리스타 K. 토마슨
  • 17,100원 (10%950)
  • 2024-12-16
  • : 36,247

Embrace: 내면의 야생을 사랑하기


크리스타 K. 토마슨 저, '악마와 함께 춤을'을 읽고


분노, 시기, 질투, 앙심, 경멸. 듣기만 해도 몸서리치는 사람도 있을 테다. 흔히 우리가 부정적인 혹은 나쁜 감정이라고 하는, 그래서 없애야만 하고, 없앨 수 없으면 피해야 하고, 피할 수 없으면 인내심을 발휘하여 적절히(?) 억눌러야 한다고 느끼는 것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감정들이 정말 나쁜 것일까? 정말 우리와 우리 삶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는 것일까? 혹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책은 그 누명을 벗기고 본래의 의미를 회복시키며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삶, 균형 잡힌 삶, 깊고 풍성한 삶을 위해 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건강한 정원에는 지렁이가 산다. 지렁이는 비 온 다음날 눈에 잘 띄며, 작은 뱀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길고 미끌거리는 징그러운 생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지렁이는 흙 속의 유기물을 먹고 배출하는 과정에서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질감도 좋게 만든다. 지렁이가 배설한 흙을 분변토라고 하는데, 이 분변토는 인류가 얻을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 안전한 비료라고 여겨진다. 생태계 최하위에 놓인 지렁이가 최고 포식자인 인간의 눈에 하찮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지렁이는 묵묵히 땅을 일구며 지구의 토양을 풍성히 해준 동물이다. 그러므로 지렁이가 많이 사는 땅은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땅이며, 지렁이는 지구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생명체인 것이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자 현재진행형인 여섯 번째 대멸종을 주도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한다면, 적어도 우리 인간은 지렁이를 홀대해선 안 된다. 고마워해야 한다.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한 교수인 저자는 나쁜 감정을 정원의 지렁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원은 인간과 인간의 삶을 의미한다.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은 건강한 정원이며, 건강한 정원은 지렁이 덕을 톡톡히 본 것이므로, 지렁이인 나쁜 감정은 건강한 인간과 건강한 삶에 필수라는 것이다. 저자는 부정적인 감정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면 너그러운 솔직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감정을 짓밟거나 부풀리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원의 지렁이를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 지렁이가 계속 머물며 정원을 더 풍요롭게 해 주길 원하는 마음을 갖길 바라면서 말이다. 


상식처럼 널리 알려진 관념에 정면으로 대응하며 조곤조곤 할 말을 다 하는 이 책이 독자의 이목을 끌고 강한 설득력까지 갖는 이유는 저자의 전공인 철학과 고전학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지혜의 열매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나쁜 감정을 대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우리 대부분을 향해 객관적이고 공정한 분석을 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사람 중엔 두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감정을 통제하려는 사람들(감정 통제형 성인)이고, 다른 하나는 감정을 길들이려는 사람들(감정 수양형 성인)이다. 이 두 부류를 감정 성인이라고 부르는데, 저자는 조지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성인의 삶이 최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웰은 좋은 인간이 되는 게 성인이 되는 것보다 낫다고 했고, 성인의 삶에는 결함이 있으며, 성인이 되려면 평범한 인간의 삶에 관심을 끊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감정 성인이 되려고 애쓰는 건 인간성을 덜어 내려는 행위인 것이다. 


저자는 감정 통제형 성인을 지향한 인물로 스토아 학파와 간디를 꼽는다. 감정 통제형 성인에게 감정은 비합리적이다. 그들에게 감정,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착시 현상이나 잘못된 믿음과 같다. 그들에 따르면 우리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삶이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잘못됐기 대문이다. 이런 잘못을 바로잡으면 감정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본다. 간디에게 부정적인 감정은 망상과 같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 주변의 살아 숨 쉬는 인간 세계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인간계에 덜 신경을 써야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감정 수양형 성인은 감정 통제형 성인보다는 감정을 덜 의심하는데, 이 성인들이 보기에 나쁜 감정은 뿌리 뽑거나 억누를 것이 아니라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수양하거나 변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들은 감정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비이성적인 힘이라는 사고를 거부한다. 그들은 적절히 개입하면 감정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본다. 잘 단련만 하면 감정을 없애지 않으면서 주체성을 빼앗기지 않고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중 대표적으로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면서 의문을 제시한다. 과연 감정을 길들일 수 있을까,라고. 그리고 설령 길들일 수 있다고 해도 꼭 그래야만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성으로 감정을 길들일 수 있는가? 느껴야 한다고 결정한 어떤 특정한 감정만을 우리가 느낄 수 있는가?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은 채 곧바로 우리를 장악하는 힘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다른 감정이 우리를 삼킬 때도 많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느껴야 한다고 생각한 감정이 잘못될 수도 있지 않은가?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감정이 우리의 말을 듣도록 훈련시키기보다는 우리가 감정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쁜 감정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 이유는 그것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감정은 마음의 벽장에서 치워야 할 잡동사니가 아니라고. 지렁이가 정원의 일부인 것처럼 감정은 내 삶의 일부라고. 지렁이다움을 모두 벗어던져야만 녀석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지렁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서 당당하게 제안한다. 나쁜 감정을 느낄 때마다 그냥 내버려 두고 느끼라고. 그러면 된다고. 


다음으로 저자는 악마를 위한 공간을 만들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나쁜 감정도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의 일부인 동시에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애착의 일부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이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소중히 여겨서 나쁜 감정을 느끼는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자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내놓는다. 자아를 사랑한다는 건 항상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존재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런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알긴 어려우므로 우리가 직면한 진정한 도전은 그런 존재를 솔직하게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변명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저자는 몽테뉴와 니체를 들며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몽테뉴 작품의 큰 주제 중 하나는 인간 본성의 불완전함이라고 한다. 니체 역시 우리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원인을 성자라고 하는데, 이 성자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경멸하고 거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사랑과 수용으로 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감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해롭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우리에게 말 걸어오는 것이 싫기 때문이며, 우리가 감정 때문에 나쁜 짓을 하는 이유는 자신이 나쁜 감정을 느끼도록 내버려 두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쁜 감정 자체가 악한 게 아니라 그 감정을 탓하며 나쁜 짓을 하기로 판단하고 행한 생각과 의지가 악하다는 말이다.


2부에서 저자는 분노,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 같은 나쁜 감정들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어 하나씩 기존의 관념들을 반박해 나간다. 먼저 분노를 언급하는데 내가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분노를 해결하는 방법은 내 분노를 교정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된 데 누군가의 책임이 있다고 가정하지 말고, 그저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를 스스로 솔직히 살펴야 된다고 한다. 또한 분노는 종류를 갖지 않는다. 단지 분노와 그 분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올바른 종류의 분노만 느끼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대신 모든 분노를 솔직하게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오로지 정의로운 분노만 느끼려고 하면 지저분하고 복잡한 인간적인 부분이 줄어든다. 


아래 발췌한 부분에서 나는 최근 우리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몇몇 개인을 떠올렸다. 


| 자신을 성찰하며 수반되는 고통과 수고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할 권리는 없다. 우리는 판타지 세계를 구축해서 나쁜 감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가 없으며,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그 판타지 세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이 분노로 괴물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우리는 실패, 방황 또는 외로움을 맞닥뜨리기보다는 차라리 적을 만들기를 원한다. 적이 있으면 자기 의심으로부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자신이 분노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분노를 성급하게 정당화하고 악당을 탓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런 모습들이 반지성적인 행태의 이면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책은 분노 외에 시기와 질투, 앙심과 쌤통, 경멸을 파헤치며 저자의 예리한 통찰을 다루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지렁이를 사랑하라." 이 문장의 방점은 '사랑하라'이다. 단순히 용납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이다. 니체의 '아모르 파티' 역시 네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뜻에 그치지 않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같은 논리다. 우리 인간을 이루는 당당한 구성 요소인 나쁜 감정을 우린 제거하려 하지도 말고 피하지도 무시하지도 말고 사랑해야 한다. 이 감정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요소이며, 이것들은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가 감정 성인이 되려는 열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추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저자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사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나쁘다고 여기는 이유는 나쁜 감정이 의미하지 않는 뭔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예컨대 앙심이나 질투를 느끼는 건 내가 악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이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그 감정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쁜 감정은 다루기 어려울 순 있어도 괴물이 아니라고, 그저 야생적인 것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쩌면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삶의 의미가 부분적일지라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나쁜 감정들을 악마화시켜왔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이성의 힘과 상관없이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만 바르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정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영역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나쁜 감정들이 우리 삶을 파괴하는 게 아니라 그 감정들과 연관되어 작동하는 우리의 이성과 신념과 잘못된 판단과 행동이 우리 삶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생각의 전환이다. 덕분에 조금 더 객관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악마화시켰던 대상을 제거하니 보다 내밀한 내 모습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이런 감정들을 느끼는 내 모습도 넉넉히 끌어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내면의 야생을 사랑할 수 있기를. 그래서 나뿐 아니라 타자를 더욱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흐름출판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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