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보다 이야기꾼이 더 드러나는 작품
무라카미 하루키 저, ‘일인칭 단수’를 읽고
1. 돌베개에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않았지만, 거기엔 어떤 공통된 정서가 흐르는 것 같다. 이 짧은 단편을 읽고도 동일한 걸 느꼈다. 몇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을 텐데, 이를테면, 죽음, 문학, 환상, 섹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어리숙하고 어설픈 남자 주인공 등이다. 언뜻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키워드들은 하루키의 사상 혹은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념과 통속의 조화를 도스토옙스키 덕분에 진하게 맛보았던 나는 하루키 역시 그만의 독특한 방식과 고유한 문체로 소설을 쓰는, 현대문학의 거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 깊이랄까, 통찰이랄까 하는 측면에서 내게 하루키는 가볍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루키만이 그려낼 수 있다고 보이는 현대인의 몽환적인 정서는 무척이나 인상적인데, 어쩌면 이것이 하루키 팬들이 그에게 빠져드는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한다. 은근히 매력적이고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베개에‘라는 단편은 바로 이러한 하루키만의 고유한 정서가 고스란히 발현된 작품으로 보인다. 젊ㅇ 남자 청년과 그보다 몇 살 연상인 한 여자 사이의 짧은 인연, 하룻밤의 정사, 여자가 남긴 시, 그리고 그 시를 음미하며 그 여자를 궁금해하고 그저 일상을 또 살아가는 남자. 이것이 이 소설의 전부다. 줄거리랄 것도 없는 이 간단한 설정 만으로 자기의 색채를 또다시 그려낸 하루키라는 작가의 비범함과 그 묘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2. 크림
이 단편 또한 한 어리숙한 남자 재수생이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어떤 교훈이랄까 메시지랄까 하는 것을 얻어내지 못한 채 끝나버리는, 역시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작품이다.
어릴 적 같은 피아노 학원을 다녔던 한 여자아이가 느닷없이 보낸 피아노 리사이틀 초대권을 받고 찾아간 콘서트장은 고베의 어느 깊은 시골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내고 용돈도 털어 그 생소한 장소를 찾아갔지만, 거기엔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한 건물이 자물쇠로 잠겨 있을 뿐이었다. 속았나 싶은 생각에 허탈해하며 되돌아오는 길에 잠시 공원 정자에 앉아 쉬는데, 공황발작 같은 게 찾아왔고 그 발작 가운데 환상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그 마을 주민인 것 같은 어떤 할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그 할아버지는 뜬금없이 중심에 여러 개인 원,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인생에서 공을 들여 가치 있는 것을 이루고 나면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된다는 수수께끼 같은 말까지 던지고는 주인공의 발작이 사라지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이 작품의 키는 주인공이 자기 이야기를 아는 동생에게 들려주는 말 가운데 있는 것 같다. 우리 인생에는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뜨리는 사건이 가끔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주인공은 그럴 때마다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 생각한다고 한다. 자기 안에 있을 어떤 특별한 크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는 말과 함께.
3.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음악, 그중에서도 재즈 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하루키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1955년에 사망한 찰리 파커를 8년 뒤인 1963년 어느 폐간된 대학 문예지에서 주인공의 도발적인 상상력으로 살려낸 사건이 발단이다. 세월이 흐른 뒤 뉴욕의 어느 한 레코드점에서 자신이 상상했던 가상의 음반을 발견하는 환상 섞인 경험, 그리고 찰리 파커가 나오는 꿈을 꾼 경험을 흥미롭게 이야기해 준다 (역시 하루키는 재담꾼이다). 문예지에 실은 글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이 이 소설 마지막 문장으로 쓰인 걸로 미루어 보아 주인공의 뉴욕 경험이나 꿈 이야기 모두 허구라고 판단할 수도 있겠다. 모두가 허구이고 이 소설을 읽은 나는 하루키에게 또 보기 좋게 낚인 걸지도 모르지만, 하루키가 찰리 파커의 알토 색소폰을 사랑했다는 사실만은 허구가 아닌 듯하다. 즉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꾼이 남는 작품.
4. 위드 더 비틀스
이 소설도 음악 애호가인 하루키가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역시나 어리숙한 젊은 남자가 주인공인데, 고등학교 시절, 꿈인 듯 현실인 듯 기억에 남은 하나의 단편적인 장면을 소개하며 소설이 시작된다. 잘 알지 못하는 한 동급생이었던 여학생이 비틀스 앨범 (LP)을 들고 치맛자락을 날리며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는 장면이다. 이어지는 소설의 주된 이야기는 그 기억과는 별개로 진행되는데, 아마도 하루키는 과거의 기억을 그 장면처럼 아련하게 회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다.
주된 이야기라고 해봤자 어리숙한 남자 주인공이 처음으로 사귀었던 여자친구, 그리고 약속시간을 잘못 알고 찾아간 그녀의 집에서 예기치 않게 만나 뜻밖의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냈던 여자친구의 오빠 이야기가 전부다. 아니나 다를까 세월이 흐르고 남자 주인공은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도쿄에서 우연히 그 오빠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여동생이, 그러니까 우리 주인공의 첫 여자친구가 몇 년 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그로부터 전해 듣게 된다. 기억은 날개를 날고 과거로 날아가 그녀와 헤어지던 날을 비춘다. 죽은 옛 여자친구의 오빠가 남긴 한 마디가 그의 가슴에 새겨졌을 듯하다. 죽은 사요코는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이후에도 주인공을 가장 좋아했었던 것 같다는 말. 소설은 그 아련한 기억을 뒤로하면서 그렇게 끝이 난다.
5.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뭔지 몰랐다. 야구팀 이름이었다. 소설이 아닌 하루키 산문처럼 보이는 이 글은 하루키 본인이 주인공이다 (다른 작품도 하루키가 주인공일지 모르나, 이 작품엔 하루키라는 이름이 그대로 사용된다). 하루키가 왜 야쿠르트 스왈로스 팀을 응원하게 되었는지, 왜 그 팀의 홈구장인 진구 구장에서 팀이 이기든 지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는지를 유머를 섞어가며, 조금은 툴툴대며 써 내려간 글이다. 재미난 건 하루키가 엄청 유명해지기 전에 이 야구팀 경기를 보면서 끄적인 시들을 한데 모은 시집을 거의 자비출판 식으로 500부 찍었다는 사실이다. 300부는 팔리고 200부는 선물로 사용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유명해지고 나서 그 시집은 희귀본이 되어 가격이 엄청 뛰어올랐다고 한다. 인생은 참 모를 일이다. 이 작품 덕분에 하루키가 야구도 사랑했고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이 책 덕분에 하루키의 소설이 아니라 작가 하루키를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6. 사육제
하루키의 클래식 사랑을 여과 없이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하루키 자신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한 못생긴 여자와의 인연의 시작과 중간과정 및 끝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인데, 하루키의 여자에 대한 관점도 엿볼 수 있다. 우연히 콘서트장에서 친구 덕분에 만난 그녀는 클래식에 관한 취향이 비슷했고, 덕분에 둘이서 한동안 클래식을 같이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었다. 무인도에 들고 갈 단 하나의 클래식을 슈만의 사육제로 꼽는 두 사람은 사육제 마니아가 되어 우정을 발전시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녀로부터 소식이 끊기게 되는데, 주인공은 티브이에서 그녀가 사기범으로 체포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외면과 내면이 다른 우리 인간의 본성을 슈만의 사육제 연주에 빗대어 이야기하던 그녀의 이면에는 사기범의 얼굴을 감추고 있었던 것일까? 주인공은 과거 어느 다른 못생긴 여자와 데이트했던 경험까지 소환하며 과거 회상을 마무리한다.
7.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발 닿는 대로 여행하다 밤늦게 도착한 어느 시골에서 인적이 드문 한 허름한 온천료칸에 주인공 남자가 투숙하게 된 일화를 그린 작품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배경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도. 일본 온천이 등장하는 작품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정서를 풍기는 것 같다.
하루키는 여기에서도 환상적인 요소를 빼놓지 않는다. 주인공이 아무도 없는 온천물에 호젓이 몸을 담그고 있을 때였다. 문이 스르륵 열리며 한 직원이 들어왔다.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였다. 물이 괜찮냐는 둥 이것저것을 물어보기도 하며 나중엔 일을 마치고 주인공의 요구에 따라 병맥주 두 병과 간단한 안주를 들고 방으로 찾아와 진지한 대화도 나누게 된다. 어쩌다가 원숭이가 사람 말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을 수 있었던 주인공은 원숭이가 자신의 성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그동안 흠모하는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훔쳤다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에 간직하게 된다. 다음날 아침 료칸을 나갈 때 확인한 바, 그곳에서는 병맥주를 팔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간밤에 원숭이와 나눴던 대화는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가 하는 의문을 주인공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속에만 담아 두는데, 세월이 지나고 어느 날 동료인 한 여자가 전화하다가 자신의 이름을 종종 잊어버린다는 고백을 듣고 주인공은 그때 그 원숭이를 떠올린다.
8. 일인칭 단수
여덟 단편이 실린 이 책의 제목으로도 선정된 마지막 작품은 가장 짧기도 하지만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하루키 자신으로 여겨지는 남자 주인공은 일 년에 고작 서너 번 정도 정장을 차려입는데, 문제가 된 그날 한가로운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그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정장을 차려입었고, 차려입은 김에 산책을 나갔으며, 산책을 나간 김에 평소에 가지 않는, 멀리 떨어진 바를 찾는다. 적당한 조명과 적당한 음악이 독서하기에 적당했으나, 거기에서도 독서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날따라 정장을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색함을 넘어 위화감을 불러올 정도로 괴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일행 없이 앉아 있던 한 중년 여성이 바에 들어오는 여러 손님들에 떠밀려 주인공 바로 옆으로 밀려오게 되었는데, 뜬금없이 그 여자가 주인공에게 가시 돋친 말로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얼굴을 자세히 봐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 여자는 삼 년 전 물가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라면서 주인공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는 말을 내던진다. 몇 마디 하다가 결국 주인공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 진실을 폭로할까 두려워서였는지, 그 여자가 정신이 이상하다고 판단해서인지 분별하지 못한 채 바를 나선다.
밖으로 나온 주인공은 모든 게 바뀌었다고 느끼게 된다. 분명 그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아름다운 봄날이었는데, 그 여자를 만난 후에는 세상이 갑자기 흉측한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주인공은 자꾸만 그 여자의 말을 되뇌인다. “부끄러운 줄 알아요!“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이성과 무관하게 뭔가 수상한 기분이 드는 날. 좋지 않은 예감으로 생각과 마음이 충만하여 무엇을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날. 일상적인 일들을 꾸역꾸역 진행해 보지만,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 그리고 어김없이 찾아드는, 불길함을 가시화시키는 계시 같은 사건. 그 사건이 어떤 내밀한 감정을 건드리게 되면 마치 어떤 예언이라도 적중한 듯 묘한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이성으로 낱낱이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저 이런 감성으로 이 작품을,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을, 나아가 작가 하루키를 느끼게 된다.
마무리하며
엘에이행 비행기 안에서 크게 집중하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가독성 높고 재미와 의미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책이었다. 별 일 아닌 일들을, 사소하디 사소한 감정선과 사사로운 일상의 조각들에 숨을 불어넣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작가 하루키. 소설도 좋지만 그의 산문 혹은 에세이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책장엔 그의 ‘잡문집’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키는 현대문학의 숲을 조망하기 의해 거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일 것이다. 분명 배울 게 많은 작가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도 작가로 성장해 간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
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
5. 일인칭 단수: https://rtmodel.tistory.com/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