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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 리처드 J. 마우 외
  • 12,600원 (10%700)
  • 2019-03-25
  • : 351

나는 종종 홀로 남곤 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 구도에서 어디에서 속하지도 못한 채로 말이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던 나로서는 기독교 신앙을 갖는 게 이율배반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스스로의 자괴감과는 달리, 학교나 교회의 사람들은 이러한 구도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정해야만 했다. 아니, 언젠가는 결정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의 배움을 포기할 것인지, 창세기를 다 뒤엎어야만 할 것인지 말이다.

 

아마도 나는 배움을 포기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세포생물학, 생화학, 세포생물학, 유전학, 생리학으로 이어지는 대학의 과목들 중에서 유일하게 듣지 않았던 과목이 ‘진화학’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남겨진 마지막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을 가득 채운 생물 종들이 진화라는 방법으로 ‘창조’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진화를 방법이라는 도구로 여기고 창조를 세상의 시작으로 보았던 것처럼 어느 정도 유신 진화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인간의 지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모든 종보다 특별하다는,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 특별하게 ‘지음’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물론 지금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이 진화로 나타났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재를 격하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인간이 여타의 모든 종을 ‘다스릴’ 정도로 뛰어난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나는 명확히 답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철저하게 나의 한계다. 사실 나는 인간이 다른 종에 비해 월등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종에 비해 뛰어난 부분이 있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고민들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랫동안 교회에서 고등부 교사로 있으면서 수많은 질문을 마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아직 알지 못한다는, 결정을 유보하는 상태로 남아있지 못했다. 오히려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배경을 무기 삼아, 학생들에게는 기존의 창조론을 옹호하는 투사로 든든하게 남아있는 게 더 나를 지키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러한 투사의 위치가 나를 빛나게 만들어주었다는 뜻이다. 누구보다 내가 성서를 올바로 해석하고 있다는 교만에 빠져있도록 만들었다. 수많은 변증학 책들을 읽으며 나 자신을 무장해갔다. 창조과학 책을 읽으면서 무신론에 대항하려고도 해보았다. 신은 인간의 상상이고 종교는 인간의 발명이라는 그들의 기치를 밟으라고 나를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창조과학이 보여주는 과학이 아닌 모습, 조악한 논리에 조금은 실망하고 있었다. 그것으로는 무신론에 대항할 수 없어 보였다.

 

사실 난 쌓여만 가는 고민 더미에 묻혀 옴짝달싹 못하는 중이었다. 생물학이 전해주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집단의 환경 적응과 종의 다양성을 설파하는 진화론의 설명이 아름답다고 여길 정도였으니 말이다. 신은 왜 나의 삶에 이러한 시련을 주시는가, 수 만 번 질문했던 것 같다. 왜 나를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하셔서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시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신론을 택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이 단서였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너무 오랜 일이 지난 이후였다. 2014년 그분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분은 어디 계시는가.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으신다는 분이 어쩌다 죄 없는 어린 학생들의 수많은 목숨이 꺼져가는 사건을 지켜만 보셨는가. 나는 그때쯤 교회를 나왔다. 사실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에서 나를 홀로 남겨두었던 그들이 신의 부재 사건에 대해서도 침묵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무신론까지 떨어졌던 것 같다. 신은 계시지 않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험했던 영적인 체험들과 기도의 결과는 뇌의 장난이었고 우연의 일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나님을 등지고 내가 바라는 정의를 찾으러 세상에 뛰어들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본디 조용히 살던 이가, 타자와 상호작용하기를 피곤해하던 이가 갑자기 세상과 사회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나는 이내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그것이 당연히 귀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케노시스 창조이론>이라는 책을 나는 어느 날 마주한다. 신이 자신을 비우시는 행위가 창조라는 사건이며, 그것(신의 자기 비움)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웠음은 지금도 부정할 수 없다. 이는 새로운 심상을 나에게 제공해주었다. 신이 세상을 자신의 품 안에 끌어안고 계시는 형상, 세상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는 자명한 가능성, 이것을 알고도 그분은 그분의 성품을 따라 세상을 만들었다는 사실 말이다.

 

케노시스가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나는 그제야 제 삼의 길을 깨닫는다. 창조와 진화 모두가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세월호 참사와 함께 우시는 신을 발견하며, 잔혹해 보이는 진화의 과정에도 함께하시는 신을 발견했다. 신은 자신 안에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시며 그것의 과정, 곧 고통을 감내하시기로 작정하신 듯 보였다.

 

이내 나는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에서 한 저자가 말하였던 ‘나의 성경’이 실은 나의 성경 해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창세기 1장이 세상이 어떻게 지음 받았는지, 와 기원을 설명해주는 장이 아니라 세상이 왜 지음 받았는지, 와 기능을 설명하는 거라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사족이지만, 나는 여전히 생물학도로서 그리고 지금은 심리학을 전공하는 석사생으로서 여러 해결하지 못한 고민을 여러 곳에 남겼다. <뇌의 장난, 우연의 일치>와 <영적인 체험, 신의 섭리>라는 두 영역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어려워한다. 그러나 진화와 창조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는 발견처럼, 또 다른 설명이 ‘우연히 섭리처럼’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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