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읽히는 소설
― 마누엘 푸익, ‘거미 여인의 키스’
책을 펼치자마자 대화문이 끝나는 지점이 어디인지 찾게 되는 소설. 때문에 소설이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었나를 고민하게 한 소설. 표범여인은 있는데 대체 누가 거미여인인가를 궁금하게 만드는 소설. 발렌틴의 말인지, 몰리나의 말인지 자꾸만 되돌아가 읽게 만드는 소설. 지금껏 길들여진 소설의 형식이랄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듯 자유분방한 소설. ‘색, 계’를 떠올리게 하는가 하면, 내게는 영원한 ‘이한’일 김남길의 ‘후회하지 않아’를 떠올리게 하던 소설. 1부를 힘겹게 끝내고 2부에 들어서서야 겨우 속도가 붙는 소설. 새벽 네 시, 소설을 모두 읽고 난 뒤에도 거침없는 여운으로 잠 못 들게 한 소설. 내게 있어 푸익의 ‘거미 여인의 키스’는 대략 그러했다.
소설 속에서 몰리나는 6편의 영화를 ‘들려’준다. 이것은 소설 속에서 몰리나와 발렌틴이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이며,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것은 “여기에 갇혀 있는 동안 미치지 않으려면, 이것처럼 멋진 일을 생각하는 것 빼고는 할 일이 없”으며, “내가 현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좀 내버려둬 달라는 말이야. 내가 더 이상 현실을 비관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표범여인의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맹수가 될 수 있는 위험한 여성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재 곁에 있는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장치로 보인다. 이러한 복선은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웨이터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 대사로도 나타난다. “내 진짜 이름은 비제의 여주인공인 카르멘이라는 것” 카르멘이 돈 호세를 몰락시킨 팜므파탈이라는 점에서 2부에서 제시될 몰리나의 배신의 복선을 차차 만들어 가는 것임을 볼 수 있다.
두 번째 영화는 발렌틴과 대비되는 상황을 제시한다. 마키단에게 배신을 저지르는 여가수 레니와 청년장교의 사랑이야기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몰리나와 정치적 입장에서 질 나쁜 영화라고 매도하는 발렌틴을 통해 몰리나의 여성성과 발렌틴의 남성성을 대치시키며 정치범인 발렌틴을 자극하려는 목적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총에 맞아 죽는 레니는 2부 15장의 총에 맞아 죽는 몰리나의 모습과도 중첩된다.
세 번째 영화는 발렌틴에겐 들려주지 않은, 몰리나만의 영화다. 영화 속에서는 결함이 있는 두 남녀의 사랑이 어떻게 승화되어 갈 것인가에 대해 보여준다. 그들이 빛의 세계로 나왔을 때 받은 상처에 대해 장님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들이 행복하게 보냈던 저 여름이 왜 그토록 매혹적이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소.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당신들은 서로를 아름답게 보았던 것이오. 당신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오. (중략) 당신들이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마치 장님처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한 것이오.”
이 부분은 수감 기간이라고도 볼 수 있는 ‘행복했던 여름’ 동안의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에 대해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정치범에게 정보를 빼내야 하는 입장의 몰리나와 ‘너는 나와 같은 남자’라고 말하는 발렌틴이 서로 교감을 하게 되는 것은 ‘서로를 아름답게’ 보았기 때문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눈’이라는 피상적이고 육체적인 감각을 거부하고, 장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이 소설의 전체를 관통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그래, 거기”라고 외치며 두 사람이 관계를 갖는 것은 동성과의 섹스의 수치심 때문만이 아닌 서로의 마음으로 소통하는 ‘감은 눈’의 시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 듯하다.
네 번째 영화는 상당히 재밌는 부분을 갖고 있다. 몰리나는 여자와 남자가 이별하게 되는 사건, 피상적인 영화의 끝 부분만을 발렌틴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독자는 이탤릭체로 서술되는(나는 이탤릭체로 쓰인 부분을 인물 내면의 독백이라고 생각한다.) 부분에서 영화의 그 이후를 만날 수 있다.
여자, 청년, 어머니, 아버지, 처녀, 동료에 관한 상황을 마치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 인물에게서 떨어져서 서술한다. 반복되는 어미를 사용해 심경과 사건을 들려줌으로서 인물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객관화시키고 각 인물들의 상황을 분절시킨다.
마지막 영화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정점을 찍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발렌틴은 죽어가면서 이 영화를 재조합하기에 이르는데, 마르타로 등장하는 여자는 몰리나라고 볼 수 있다.
몰리나는 영화를 들려줄 때 영화 주인공의 이름 대신 여자, 청년 등으로 지칭한다. 영화의 내용은 달라지지만 특정한 캐릭터성은 사라진 지칭으로 인해 마치 다른 영화 속 인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자나 청년이라는 단어로만 영화 속 인물들이 기억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이는 몰리나의 입을 거쳐서 나오는, 몰리나의 주관적인 판단을 거쳐 입 밖으로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몰리나는 이야기를 하다 끊기도 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부풀려 이야기하기도 한다. 몰리나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조합되거나 덧붙여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인물들이라는 이야기다.
이 영화들을 살펴보고 있자면 하나의 공통점이 도출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이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는 결말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랑은 태생적인 것(표범여인), 정치적 상황(나치), 외모적 결함, 처한 세계(유럽과 라틴 아메리카), 심지어는 주술적인 부분(좀비), 돈이라는 갈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은 사랑을 하지만 배신을 당하거나, 죽음을 당하거나, 이별을 종용 당한다.
스크린, 아니 정확히는 몰리나의 머릿속의 인물들의 비극은 현재 감방에 갇힌 이 두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이들 역시 행복한 결말을 맡기에는 영화에서 등장한 인물들의 삶을 닮은, 영화의 삶보다도 훨씬 비극적인 결함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삶을 집합한 듯한 두 사람은 16장에 이르자 몰리나가 들려준 모든 영화가 발렌틴의 무의식 속에서 재조합 된다. 몰리나가 나름의 ‘편집’을 가했던 영화 속 이야기를 ‘재편집’하는 발렌틴의 모습은 그것이 어쩌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어도 좋을, 그들만의 교감 방식으로 변화하게 됐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너도 나와 같은 몸을 가진 남자’, 자신을 여자라고 지칭하는 몰리나를 향해 ‘거기서 여자는 너야?’라고 묻던 발렌틴조차도 몰리나의 여성성을 인정하고야만 부분이 바로 몰리나를 ‘거미여인’으로 명명하는 부분이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데다 가늘고 힘이 없는 거미줄, 그러나 무엇이든 걸리기만 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거미줄은 처음엔 위협적이지 않지만 덫에 걸린 뒤에야 그것이 덫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투명한 감옥이다. 발렌틴에게 있어 몰리나는 감옥 속의 또 다른 감옥이며, 가장 편안하고 매혹적인 덫이다. 발렌틴은 결국 덫에 걸린다. 그가 덫에 걸리게 되는 순간은 다름 아닌 키스.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곤충은 희미하고 가는 줄에 꽁꽁 묶여 결국 잡아먹힌다.
거미줄도 덫이거니와 암컷 거미는 자체로도 위협적이다. 암컷 거미가 교미 후 수컷 거미를 잡아먹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생식을 마친 후의 암컷 거미는 수컷을 그저 새끼들을 위한 영양분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비정한 거미의 습성인 것이다.
이러한 거미의 교미를 통해 성은 곧 죽음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섹스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오르가즘이 무아의 지경에 도달한다고 해서 오르가즘은 프랑스어로 ‘작은 죽음’이라고 풀이된다. 서로를 위험하게 만드는 접촉, 섹스가 일종의 죽음이라는 것에서 몰리나와 발렌틴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생식을 목적으로 한 비정한 암컷 거미에 비해 몰리나의 경우 그보다 더 비정한 인간의 손바닥에 거미줄을 친 가엾은 암컷 거미라는데에서는 좀 차이가 있다. 언젠가 손이 다물어지는 순간 위압적인 힘에 의해 파스락 소리와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다라는 점에서.
감추어야 하는 발렌틴과 그것을 드러내도록 만들어야 하는 몰리나 사이에는 편지와 볼레로만큼의 간극이 생긴다. 그러나 나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의 짐”이며 “이런 정보로 네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던 발렌틴이 “난 너를 믿어. 너도 날 믿지?”로 변화하는 동안, 그들의 유대관계는 처음의 것과 달라진다. 사경을 헤매는 발렌틴에게 마르타는 “당신이 내게 숨기지 않는 것처럼, 나도 당신에게 비밀이 없을 때에만” 너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몰리나는 발렌틴에게 도착한 편지가 영화 속의 볼레로와 비슷하다고 말한다. 조직의 활동내용을 감춰서 전달하는 편지는 사랑하는 사람의 안부를 묻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비록 그 내용은 거짓이라 할지라도 사랑의 표현에 있어서 볼레로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요지다.
집권세력에게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투쟁’과, 영화 속에서 계속해서 죽음으로 되갚아지는 ‘사랑’은 양 쪽 모두 들켜서는 안될 금기라는 점에서 맞닿는다. 금기와 금기가 만나는 지점에서 투쟁의 실현은 몰리나에게로, 냉소적이던 발렌틴에게로 두 사람의 금기는 교차한다.
몰리나와 관계를 맺은 이후 동료와 투쟁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며 몰리나에게 모든 것을 털어냈다고 생각한 발렌틴에게도 가장 두려운 질문은 바로 ‘사랑’이다.
마르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은 모를거야! 이 말만은 당신에게 할 수 없었어, 당신이 그것을 물어볼지 몰라 두려웠고, 그러면 당신을 영원히 잃어버릴 것 같았어
발렌틴이 질문을 두려워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몰리나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그의 내지는 그녀의 질문을 받아들여 그것에 일일이 답을 하는 순간 투쟁의 금기도, 마음의 경계도 허물어져 내릴까 두려웠던 것이다. 마치 ‘잘못 잠긴 수도꼭지’처럼 자신이 모조리 새어나갈까 그는 두려웠던 것이다. 발렌틴에게 있어서 최고의 금기는 ‘사랑’이다.
그리고 금기의 이야기들로 가득한 ‘거미여인의 키스’는 금기에 관한 기록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너무 느긋하게 준비하다 보니 못 다한 이야기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 이야기도 많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과 지나치게 느긋했던 내 자신을 탓하면서 커다란 입 두 개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던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