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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out1124님의 서재
  •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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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5-05-01
  • : 2,319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

―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일반적으로 김연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말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이 말은 문체론적으로 분리될 필요가 있다. 즉, ‘인문학적’이란 말은 기록된 역사로의 거시사로, ‘상상력’이란 말은 기록되지 않은 역사로의 미시사로 정리할 수 있단 얘기다. 이 텍스트 안에서의 거시사라면 왕오천축국전의 축약본과 그에 대한 주석이 해당되고, 미시사라면 그의 여자 친구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이 그에 해당된다. 즉, 독자는 여기서 표면적으로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 두 개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기록된 역사에 대한 서술 부분을 살펴보자.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오는 나라에 대해 혜초는 이렇게 썼다. “이름은 소발나구달라(蘇跋那具怛羅)국이라고 한다. 토번국의 관할 아래 있다. 의상은 북천축과 비슷하나 말은 다르며 지대가 대단히 춥다.”

 

마르코 폴로는『동방견문록』에 이렇게 썼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한 이 사흘 거리를 다 가면, 동북쪽과 동쪽 사이로 거의 40일 거리를 줄곧 산과 능선과 계곡을 지나고 수많은 강과 황야를 거쳐서 기행해야 한다.…중략…그들은 힘이 세고 사악한 사람들이다.”

 

한편 혜초보다 먼저 이 지역을 다녀간 현장은 『대당서역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발로라국은 주위가 사천여리나 되고 대설산 속에 있으며 동서는 길고 남북은 좁다. 의복은 가죽옷이고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

 

 

‘썼다’라는 동사와 텍스트의 직접 인용을 통해 작가는 역사를 기록했다는 행위에 대한 강조를 하고 있다. 즉, 다시 말해 인용문 안의 내용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다만 그렇게 ‘쓰여진’ 기록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강조들은 단순히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기록되지 않은 서사와의 대비를 통해 이 소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신입생이라면 새벽 네시까지 졸음을 참아가며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받아 마신 뒤 겨우 잠들었다가 해가 뜨면 선배들보다 먼저 일어나 2학년생들을 도와 밥을 지어야 했다. 그런 몸으로 선인봉에 매달렸기 때문에 온전히 버텨낼 수 없었다. 중간쯤 올라가니 육체적 한계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봤지만,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정상에 올랐다. 거기가 바로 육체적 한계를 넘어선 지점일 것이다. 그 지점은 어떤 사람의 등반일지에도 나오지 않는다.

 

문장은 몹시도 더디게 진행됐다. 인과관계에 어긋나는 일들은 문장으로 남기지 않았다. …중략… 여자친구에게 현실의 그는 은밀한 존재, 혹은 무의미한 존재였다. 은밀한 존재는 현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소설 속의 문장으로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는 대학시절 산악부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등반일지를 써왔다. 그러나 처음 등반한 도봉산 정상에 대한 기록은 남길 수 없었다. 정상은 이미 육체적 한계를 넘어서 도달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현실과 꿈이 혼재된 상태이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정상을 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또한 그는 여자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긴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설 작업은 어떤가.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문장의 탈락을 결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록으로서 쓰여진 모든 것들이 진실과 사실만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는 이야기다. 아니 좀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실을 다룰 순 있되 진실은 결코 손댈 수 없다는 것이 맞겠다.

 

 

즉, 이 소설의 전제는 분명히 일어났으나 기록은 되지 않은 일, 기록이 되지 않음으로써 마치 없었던 일로 간주되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이다. 소설은 이러한 기록된 역사와 기록되지 않은 개인사의 교차와 대비를 통해 이야기 그 너머의 진실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다. 삶이란 단순히 인과관계에 의해 선택되고,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다.

 

 

여자친구가 투신한 후 그는 아홉 달 동안이나 소설 쓰는 일에만 몰두한다. 하고 많은 일 중에 그는 왜 ‘소설’을 택했을까. 소설은 언어와 삶이 맞닿는 지점에서 탄생한다. 단순히 언어라고만 할 수도, 단순히 삶이라고만 할 수도 없는 치열하게 혼재된 거기가 바로 소설이 탄생하는 곳이다.

 

 

그리고 김연수의 이 소설 안에서는 그것을 증명하듯이 유난히 혼재된 것들이 많이 나열되고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한자와 영어와 한글이 혼재되어 있으며, 원문과 주석이 혼재되어 있고, 일인칭 화자인 ‘나’와 삼인칭 화자인 ‘그’가 혼재 되어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와 현재가 혼재 되어 있다. 대체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삶의 속성이다. 언어로 차마 다 담아낼 수 없는 크기의 진실과 불분명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를 통해 논리적 인과관계를 성립하려고 애쓴다. 바로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서다.

 

 

“부모님, 그리고 학우 여러분! 용기가 없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야만의 시대에 더 이상 회색인이나 방관자로 살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후회는 없어.” 이 유서는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없었습니다”라는 존칭에서 “후회는 없어”라는 비칭 사이의 거대한 틈 때문이었다.

 

 

“없었습니다”와 “후회는 없어”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틈은 바로 그들이 살았던, 살고 있는 ‘삶’, 더듬어 볼 수 있는 ‘기억’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가 해답을 찾는 행위는 명백히 보자면 여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한 행위라기보다는, 여자친구의 죽음을 납득하기 위한 행위이다. 그러니 그의 내면에서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는 존칭 언어와 비칭 언어 사이의 틈은 그에게 소설적 해석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소설을 쓰면 쓸수록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하고자 하는 보통의 이유와는 다소 다른 지점이란 것이다. 이해와 소통이 전제되어 있는 문학이 아니라, 소통이 불가하고 존재 자체에 회의를 품게 되는 것이 문학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진실들을 표현하는 행위가 언어로만 가능하다는 인정이 그가 처해 있는 총체적인 상황이다.

 

 

때문에 소설을 다 쓰고 난 그가 히말라야로 향하는 이유 또한 소설을 썼던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즉, 히말라야로 향하는 것은 소설을 쓰는 행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가 결국 깨닫게 된 것은, 아무리 해도, 그러니까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총동원해도’ 문장으로 남길 수 없는 일들이 삶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H는 이렇게 주석을 달아놓았다. ‘동서남북의 모든 나라들이 소발률을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겼다. 소발률에서는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아랍과 인도와 중국과 티베트의 문화가 혼재했다.’ 모든 나라에게 소발률 너머는 이방의 땅이었다. 거기가 바로 지금 내가 가는 곳이다. 모든 게 혼재하는 곳, 수령과 백성을 버려두고 왕 혼자서 도망간 곳.

 

그는 언제나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뒤섞여 있는 곳에 매료됐다.

더 이상 쓸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써나갈 때 그는 가닿을 수 있는 마지막 지점에 이르렀다. 그 지점에서 그의 문장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꿈은, 문장이 끊어진 자리에서 시작했다.

 

 

그가 히말라야로 가져가려고 하는, 소설에 쓰지 않은 나머지 일들은 그에게 곧 단지 기록되지 않은 진실이다. 문장이 끊어진, 자리. 그제야 대면할 수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해 그는 히말라야로 가는 것이다. 과연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소설의 도입부분에서 인용되고 있는 헤르만 불의 말에 대한 인용은 그런 맥락에서 암시적인 구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이 대설산의 정상에 오른 사람은 독일의 헤르만 불이었다. 불은 이렇게 말했다. “며칠 후 나는 이 산기슭에 설치된 베이스캠프에서 텐트 앞에 누워 아픈 발을 돌보며 사천 미터보다 더 높은 쌍두봉을 몇 번이나 쳐다봤다.…중략…나는 그 고지대의 만년설 상부를 나의 심안(心眼)으로 몇시간 동안 살펴봤다. 그것은 내게 하나의 꿈처럼, 다른 사람들은 경험할 수 없는 꿈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실적인 꿈처럼 다가왔다.”

 

 

그가 가고자 하는 설산은 매우 현실적이나,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은 곳이라고 서술되고 있다. 소설 안에서 그러한 속성을 지닌 것이 또 하나 있다면 작중 화자인 ‘나’의 집이다. 그는 언젠가 ‘나’의 집 축대에 기어올라가 축대 ‘너머’의 세계에 대해 바라본 적이 있다. 어떤 벽이어도 넘을 수 있는 크랙과 홀드만 있다면 축대는 그 자체로 매우 현실적이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나’의 남편과 아이들과 일상이 있다.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과 같은 곳. 이 등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품 말미에 드러난 그의 편지에선 그가 축대 위에서 다만 한참 있다가 다시 내려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같은 맥락에서 그가 히말라야로 향한 이유가 설명된다. 그는 다른 원정 대원들처럼 그곳을 ‘정복’하러 가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설산 너머에서 만나게 될 진실은 결코 ‘정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란 얘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산악인은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게 설사 죽음이라고 하더라도.

 

히말라야의 고봉을 등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의 지대를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지만으로 죽음의 지대를 지날 수는 없다. 죽음의 지대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는 ‘나’의 축대에 기어올라 축대 ‘너머’를 한참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히말라야 또한 다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작중 그의 소설과 작가의 소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방향인 셈이다.

 

 

이 소설은 많은 것이 혼재되어 있는 와중에 그것들이 취하고 있는 구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끊임없이 힌트를 주고 있다. 그것을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부분은 앞서도 몇 번 언급했지만 나와 그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나를 통해 서사가 진술되도록, 또 그를 통해 서사가 진행되도록 하는 구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나를 쫓아가다가, 그를 쫓아가다가 둘을 쫓아가다가 서로의 반대 방향에 서보기도 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썼다. “122행의 앞 세 글자는 빠져 있다. …중략…蔗자 앞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글자가 있는데, 남아 있는 형태로 봐서 이 글자는 감(甘)자가 확실하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죄다 수첩에 기록했다. 몇몇 사소한 고민거리들, 문득 떠오른 일들과 좀체 가라앉지 않는 의문들,…중략…지금 그가 선 자리의 경도와 위도와 고도 등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그는 짧은 단어와 다양한 기호로 이뤄진 불완전한 문장으로 남겼다.

 

그가 눈을 뜨니 두 사람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한사람은 그에게 편지를 보낸 편집장이었고 한사람은 편집장에게 그의 공책을 건네준 나였다.

  

가만히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다가 그는 누군가 괜찮아, 라고 묻는 소리를 들었다. 그건 내 목소리였다.

 

 

여기서 ‘나’는 왕오천축국전의 축약본에 주석을 다는 번역가이며, 동시에 그의 행동에도 주석을 다는 해석자, 즉 화자이다. 그는 어떤가. 그는 ‘나’에게 해석을 당하는 객체이며 동시에 여자친구의 죽음을 해석하는 주체이다. 이는 존재적인 차원에서 둘의 모호한 관계를 증명하는 부분이다. 과연 ‘나’는 ‘나’이기만 하는가, 또 ‘그’는 ‘그’이기만 한가 말이다.

 

 

여자친구의 죽음에 주석을 다는 행위인 소설을 쓰는 작업에서 그는 논리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문장의 탈락여부를 결정하고, 나는 많은 해석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해석을 채택하는 일을 한다. 그들은 결국 같은 맥락에 있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히말라야로 간 순간, ‘나’와 ‘그’는 분리된다. ‘그’는 일상화되지 않은 ‘나’의 일면이며 일상화될 수 없는 ‘나’의 일면이다. ‘나’는 결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얘기를 주석에 달 수 없다. 수령과 백성을 버리고 소발률로 떠나 거기에 주저앉은 소린타일의 아들이 고통 받았을 것이란 무리가 없는 예상은 ‘나’의 입장에서 채택할 수 있는 최적의 주석이지만, 혹시 행복했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건 오직 ‘그’의 입장에서 가능한 상상일 뿐이다.

 

 

비단 이러한 분리된 존재의 동일성과 양면성은 나와 그의 관계에서 말고도 발견된다.

 

 

낭가파르바트는 산스크리트어로 ‘벌거벗은 산’이라는 뜻이다. 문자는 인도와 대체로 같으며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다르다는 현장의 말 그대로 다른 지역과 달리 시나어를 쓰는 디아모로이 계곡의 주민들은 이 산을 ‘디아미르’라고 부른다. 이는 ‘산중의 제왕’이라는 뜻이다.

 

 

요약하자면 낭가파르바트는 ‘벌거벗은 산’인 동시에 ‘산중의 제왕’이다. 같은 대상을 두고 서로 다른 언어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그 산의 양면성을 직시하기에 좋은 예가 된다. 낭가파르바트는 벌거벗은 산인 동시에 수많은 패배와 수많은 절망과 좌절을 체험하고 목격함으로써 ‘산중의 제왕’이 된 것이다.

 

 

작품 말미에서 ‘나’의 상상으로 그것은 더욱 가시화되고 있다.

 

 

하얗게 얼룩이 진 검은 봉우리는 그 모든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고스란히 받은 채 벌거벗고 있다. 바람이 불어오면 눈물처럼 하얀 눈송이들이 바위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린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벌거벗은 봉우리의 고통과 슬픔과 절망 속으로 걸어간다. 눈물은 그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따뜻하게 감싼다. …중략…그리고 벌거벗은 산으로 붉은 꽃과 푸른 풀과 하얀 샘이 생겨난다.

 

 

즉, 작가는 상반된 존재의 거리감을 극복하면서 거기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진실과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얼추 비슷한 것 같아서 미묘한 차이를 쉽게 간과해버리는 일이 많다. 그러나 소설 안에서 선택된 단어는 그 미묘한 차이를 십분 활용한 경우에 해당된다. 이 소설 안에서는 유난히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이해’와 ‘인정’이란 단어의 쓰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의 경계 안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히 아는 곳이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 문장에서 나는 ‘실(悉)’자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놓았다. “‘悉’자는 고대 한어에서 ‘알다’라는 뜻으로 사용됐다. 그런데 이 글자의 의미에는 다할 ‘진(盡)’자가 숨어 있다. ‘悉 ’자에는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부분을 다 알게 됐다는, 그리하여 이제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바가 없게 됐다는 뜻이 담겼다. 혜초의 여행이 실질적으로 끝나게 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그렇다. ‘나’의 주석에 따르면 혜초는 ‘알아낼 수 있는’ 모든 부분은 다 알게 됐다. 그것을 이해했다고 표현한다. 이해의 사전적 정의는 깨달아 알다.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왜 이러한 표현이 쓰였는가는 점층적으로 이 표현이 어떻게 변모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여자친구는 당신을 아주아주 많이 사랑했어요.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게 기나긴 소설을 썼지만 말이에요.

 

 

이는 ‘나’가 그를 향해 하는 대사이다. 여기서 ‘소설’은 그가 여자친구의 죽음을 합리적인 방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쓰여졌다. 소설의 인과관계에서 벗어난 문장들이 탈락했다는 것은 무엇을 배제한 이해인가를 살펴보아야한다. 그는 여자친구가 본인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서술되고 있다.

 

 

그렇다면 인정이란 무엇인가. 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다. 깨달음이나 인지의 차원을 넘어선 있는 그대로의 받아들임이다. 이해가 배제된 인정은 일어날 수 있지만, 인정이 배제된 이해는 성립이 불가능하다. 쉽게 말해서 알지 못해도 받아들일 순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알기만 하는 것은 제대로 아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런 식으로 이해와 인정의 대립은 또 다른 맥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사람들은 그게 고소 증세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구토 증세 때문에 물도 들이켜지 못하는 사람이나 밤낮없이 텐트 속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이 고소 증세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고소 증세라는 걸 이해하면서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공포와 대면하지 않는 것이다. 인정하는 즉시, 자신을 덮쳐 올 불편함과 불안함으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이다. 이해는 가능하고 인정이 불가한 이런 인물들이 소설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그 돌무더기 위에 작은 돌 하나를 얹었다. 그 행위는 등정을 앞둔 산악인에게는 자신의 자일 한쪽 끝에 죽음이 묶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후회는 없어”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그는 비로소 이해하려는 일을 그만둔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알 수 없는 일마저도 그대로 인정하는 일인 것이다. 그제야 그는 꿈을 향해 나아갈 수가 있다.

때문에 비로소 이 작품을 여러 번 읽도록 걸리는 한 부분을 해결해 낼 수 있다. 그의 여자친구가 죽기 전에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그 부분.

 

 

“풍속이 지극히 고약해서 혼인을 막 뒤섞어서 하는바, 어머니나 자매를 아내로 삼기까지 한다. …중략…공동으로 한명의 아내를 취하며, 각자가 부인을 얻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투신하기 전에 줄친 문장치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 문장은 어떻게 해석되어야만 하는가. 이것은 혜초가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유일한 문장이다. 즉, 이것은 그가 낭가파르바트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문장인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그 이후의 세계, 여자친구의 유서에서 그대로 남겨두기로 한 ‘틈’, 여기가 아닌 저기,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어야 만날 수 있는 ‘진실’일 것이다.

 

 

이로써 작가는 삶이란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인과관계로 나열해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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