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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out1124님의 서재
  • 횡단
  • 이수명
  • 16,200원 (10%900)
  • 2011-05-25
  • : 247

 

 

 

 

시는 건너가고, 다시 건너오고 있다

―이수명 시론집, 『횡단』

 

 

 

 

 

 

 

시론집을 읽는 동안 여러 장의 사진, 여러 장의 그림, 그리고 음악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늘에서 모자를 쓴 남자들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마그리트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춤을 추던 이병헌과 이은주를 잔잔하게 이끌던 쇼스타코비치의 두 번째 왈츠가 자꾸만 왔다갔다했다.

 

 

시론집. 너무 무겁고 어려운 첫 페이지였다. 그것이 무겁고 어려웠던 이유는 단지 저 세 글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책의 첫 페이지인 표지를 지나야 어떤 식으로든 말랑한 알맹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책은 표지와 친해지는데도 꽤 오래 걸렸다. 때문에 적당한 장소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문득 은행나무 아래서 횡단을 펼쳤다. 내가 앉은 벤치 근처 인공폭포에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은 꽤 격렬한 속도로 쏟아지고 있었는데 격렬하게 굽이치다 점점 느슨해지더니 공원 입구에 다다라서는 녹조류와 함께 멈춰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온도는 봄, 때는 가을인 날이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약하게 바람이 불었고, 은행잎이 떨어져 내 재킷 안쪽으로 들어왔다. 건너편에서는 계속 드럼스틱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여자애 두 명이서 합을 맞추고 있는 것 같았는데, 드럼은 아니고, 작은 북 같은 걸 연습하는 모양이었다. 잠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말하자면, 옛날 어머니들이 다리미 돌에 방망이를 두드리는 소리와도 비슷했는데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악기는 없지만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악기가 되었다.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마저도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나는 감상적이었다. 그리고 감상에 충분히 젖은 나는 첫 장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말한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발바닥에 난 홈들을 생각했다. 나는 늦둥이 막내동생의 발바닥을 기억한다. 엄마의 육아카드에 분홍색 인주를 묻혀 찍어낸 발바닥. 갓 태어난 아이의 발바닥이 보송보송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식물의 뿌리처럼 자잘하게 퍼져 있던 발바닥의 홈을 기억한다.

 

 

나이테나, 나이가 하나씩 늘어나는 것과는 달리 발바닥의 홈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깊어진다는 생각을 한다. 주름이 중력의 방향으로 서서히 추락해 가는 것이라면, 발바닥의 홈은 마치 풍화작용 같다. 몸을 지탱하는 것처럼, 시간을 지탱해 나가면서 안으로 조금씩 수렴해 나가는 것. 얼마만큼 걸어왔는지, 견뎌왔는지를 들여다본다.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말이 부서져 있다. 통째로 부서져 있다. 너는 말을 일으키는 자가 되지 않으려 한다. 말 속에는 흰 머리카락이 있다. 여기 그리고 저기. 그것을 쓴다.

 

 

흰 머리카락이 있다. 염색을 자주하는 엄마의 머리카락은 이제 거의 절반이 흰 머리카락이다. 염색을 하지 않고 견디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메릴 스트립이 될 것 같은데,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뿌리염색을 한다. 흰 머리카락.

 

 

흰 머리카락은 계속 자란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흰 머리카락은 선명하다. 시인은 그것을 쓴다. 멜라닌이 빠져나가 알비노 상태가 된 녀석을 쓴다. 하얗게 불태웠어 라는 말이 어울릴 법한 흰 머리카락을 쓴다. 그것은 결백하고 괴로운 시간을 견뎌온 것들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결국 뽑혀 나간다. 뽑기 위해 찾고, 뽑아내기 위해서 쓸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유일함이라거나 희소하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닐 것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흰 머리카락을 써야 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쓰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것으로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너는 너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관련을 만드는데 너 자신을 남용하고 있다.

 

 

언젠가 글이 올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 적이 있었다. 김경주의 외계에 나오는 외팔 화가처럼 절벽 위에 올라가 입을 벌리고 있어 볼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절벽에 나를 올려놓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는데 입을 벌리는 것은 더 오래 걸렸다.

 

 

포기하고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아선 울먹인 적이 있다. 깨끗한 백지 위에서 일정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커서를 보니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왜 쓰는 것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에 아팠을까.

 

 

나 자신과 관련도 없는 곳에 나를 남용하고 있다는 뼈아픈 말보다 왜 기다리다 망가뜨리는 것이 슬퍼지는 걸까. 그러나 결국 요는 여기에 있다.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 자꾸 엉클어진 퍼즐 조각을 제대로 맞추겠다는 마음으로 커서에 뛰어든 내게 없었던 ‘이해’다. 이해에서 멀어져야 직관에 더 가까워진다.

 

 

“매혹적인, 우리는 그 새에 경탄하고 그 새를 죽인다”

 

 

마그리트의 그림 속 소녀가 새를 뜯어 먹는다.

 

 

산 채로 인간에게 뜯어 먹힘으로서 존재의 형식이 무너지는 새, 혹은 그 존재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소녀 중에서 쾌락은 어느 편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형식의 붕괴라는, 형식의 변화 자체가 쾌락일까? 새가 잔인하게 잡아먹히고 있는데도 이 나무에는 많은 새가 날아오고 있다.

 

 

새는 수많은 형식을 거쳐 우리에게 왔고 온다. 크기, 생김새, 색, 식성이 다른 많은 새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는 많은 새를 잡거나, 보거나, 가두거나, 먹었다. 시는 다양한 새 중에 한 마리를 골라 그 새를 처리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그렇게 살아 있었던 새는, 그러나 결국 시인의 눈, 혹은 손끝에서 죽는다. 시인이 처리한 방법 그대로, 박제되어 말이다.

 

 

이미지는 묶여있고, 말은 풀려있다. 이미지는 사로잡으려 하고, 말은 해방되려 한다. 시인이 사물들에 충분히 매혹되어 있을수록 사물들은 압도적이면서도 모호하고, 순간적이면서도 다면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다.

 

 

무엇을 쓰겠다. 그 무엇을 발견한 순간부터 나는 그와 관련한 온갖 지식을 무의식중에 동원하게 된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과이므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에게로 조금씩 무너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그 무엇인가에게 굴복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해서는 안 된다.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에 치러할 단계. 내 앞에 있는 그것은 너무 강하다.

 

 

우리는 꿰뚫어보면서도 관통할 수 없다는 것에 놀란다! 꿰뚫어 본다는 것은, 즉 우리가 어떤 존재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우리에게 들어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존재들을 가볍게 스쳐 지나칠 뿐이다.

 

 

정면을 피해 돌아 가보면 그제야 녀석의 뒤통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때부터 싸워 볼 마음이 새로 생긴다. 이리 붙어보고, 저리 핥아보면서 나는 무엇에 미친 듯이 몰입한다. 어떻게 이것을 무너뜨릴까 하고. 그런데 무엇은 알듯 모르겠고, 좋은 듯 복잡하다.

 

 

시는 동질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질감을 위해서 존재한다.

 

 

한 대 때려본다. 무엇은 반항이 없다. 한 대 더 때려본다. 뒤집어 본다. 잘라본다. 들여다본다. 간지럽혀 본다. 무엇이 좋아하는 것을 데려와 본다. 무엇을 좋아하는 것을 데려와 본다. 아무리 해도 무엇을 무너뜨릴 방법이 솟아나지 않는다. 포기할까 하고 돌아선다. 그제야 슬며시 일어난 무엇이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친다. 뒤통수를 쓸면서 나는 생각한다. 아, 이제 커서를 채우러 가야겠다!

 

 

중요한 것은 단순한 피상적인 소통이 아니라, 소통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오히려 소통의 어려움을, 그 한계를 일깨우는 것이다. 언어가 지고 있는 의미 전달과 교류의 짐을 내려놓을 때, 언어는 본래의 파동을 되찾을 수 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래, 오로지 언어로만 접근했기 때문이다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언어로 나와야 할 지언정 과정마저 언어일 필요는 없었는데 라는 후회를 얻어맞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다. 언어이기를 포기한 것.

 

 

언어라는 것은 무척 딱딱한 호두알 같다. 어찌나 외형이 단단한지, 단단해서 쪼개버리고 싶고, 쪼갠 뒤에 잔뜩 부숴 놓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부숴 놓고 나면 겉껍질과는 반대로 꽤 고소하고 달달한 속살을 드러낸다. 고통스러운 작업이 반복되는 건 이 이유 때문일까. 그리고 내 힘만으론 절대 이 호두를 부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시는 형태이고 형식이고 스타일이다 40년 넘게 시를 써온 나는 그 동안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와 싸운 거야 등단시절엔 연 구분 있는 시를 쓰고 싫증이 나 그 후 산문 형태를 시도 하고 산문 형태도 지겨워 이른바 단련 형태를 시도했지 물론 이 형태도 지겨워 달련 형태이면서 시행이 가늘고 긴 형태에도 시도하고 이런 형태도 다시 지겹고 그래서 이번엔 변형된 산문 형태를 시도하고 도모하고 기획하고 기도하고 무릎 꿇고 아멘! 하고 비 오는 저녁 의자에서 일어나 방황하고 떠돌고 그러다 또 지치면 이젠 정사각형 형태다 정사각형은 죽음을 상징하지 다음엔 직사각형 형태 그것도 지치면 산문 속에 정사각형을 넣어도 보고 토막 글을 넣어도 보고 그러면서 40년이 간 거야 내 친구들은 언제나 같은 형태의 시를 쓰지만 나는 왜 이렇게 형태 앞에서 형태를 보면서 형태 속에서 형태와 싸우며 형태를 끌어안고 뒹굴고 헤매야 하는가? 결국 그 동안 난 시를 쓴 게 아니라 형태를 찾아 헤맸지「나를 쳐라」부분

 

 

호두를 부수기 위해서는 도구가 필요하다. 시인이 40년 간 해왔던 시도처럼 공구함을 계속해서 뒤져야 한다. 내 언어가 호두 수준이라면 이 시인의 언어는 사람 키 만한 바윗돌 정도가 되겠다. 여러 가지 연장으로 자꾸만 깎아 내야 하는 바윗돌.

 

 

미켈란젤로는 돌 속에 작품이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그 윤곽이 보인다고 말했다. 윤곽을 따라 계속 잘라나가면 마침내 그 작품이 나온다고 했다. 시인도 그렇게 그 돌덩어리에서 형태들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누구에게나 보이는 형태가 아닌, 시인에게만 떠올랐던 형태였을 것이다. 시인만이 알고 있고, 그래서 시인의 연장만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형태였을 것이다.

 

 

나는 이 시론집에서 이 시가 왠지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아는 형태가 생각났다.

 

 

올해 마흔 두 살. 10년 동안 사법고시 준비를 하다 그만 두고

현재는 공무원 학원에서 시간 강사를 하고 있는 형태씨.

법대를 나와서, 군에서 장교를 하다가 그만 두고 사법고시 준비를 한 형태씨.

학교 선배의 소개로 특수학교 교사인 부인을 만나 열네 살 아들을 하나 두고,

처음에는 공부를,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공부와 육아를,

아이가 자라면서는 공부와 육아와 살림을 한 형태씨.

 

 

그래서 둘째는 낳을 수 없었던 형태씨.

큰조카가 첫 생리를 한 팬티를 찝찝한 부적으로 가지고,

자신은 팬티가 반들반들해져 구멍이 나 바람이 통할 때까지 공부 했던 형태씨.

결국 사법고시 1차만 내리 붙고,

인생의 마지막 사법고시를 치른 뒤 부인에게 무능한 남편,

아들에게 심심한 아빠가 되고 만 형태씨.

 

 

장손을 낳았다는 핑계로 재산을 어떻게 물려주실 거냐고

묻는 부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된 형태씨.

추석날 하루만 더 자고 가라고 해도 부인이,

오늘 가기로 했어요,

하는 말 한 마디에 바지를 꿰어 입는 형태씨.

진 초록색 구형 중고승용차를 몰고 시골길을 내려가면서

형태를 찾고 싶어 형태를 갖추고 싶었던 형태 속의 형태.

 

 

형태가 되고 싶은 형태들이 자꾸만 떠오른 건 말장난도 말장난이지만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시의 형태를 고민하기 전에, 시에 얼마만큼의 참신한 진실을 담을 것인가가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는 더욱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왠지 자꾸만 어떻게 만들어 볼까, 어떻게 형태를 바꿔볼까 하는 고민들이 썩 달갑게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라서 맘이 묵직하다.

 

 

보르헤스의 도서관은 책 A를 찾기 위해서 A의 위치를 지적해 주는 책 B를 참고하고, B를 찾기 위해서 책 C를 참조하고 하며 무한히 이런 방식을 계속해야 한다. 인터넷도 이와 유사하지 않은가? 클릭을 해보라. 우리는 멈출 수가 없다.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A를 위해서 B를, B를 위해서 C를 찾아다녀야 하는 그의 도서관에서 보르헤스는 어느 서가엔가 이러한 수고를 하지 않아도 좋을 총체적인 ‘한 권의 책’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물론 그는 이 한권의 책을 찾지 못했다. 분명 우리 중의 누구도 이 책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 책이 읽혀지는 순간, 우주는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찾지 못했고, 읽지 못했다.

 

 

시인이 말한다.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어딘가에 정착할 수 없다. 뿌리를 내리를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홈이 깊어지고 우리는 자꾸만 걸어 나갈 수밖에 없고 지구는 그래서 끊임없는 궤도를 돌고 있다. 세상에 총체적인 것이 있다면, 우주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시인이 얘기한다.

 

 

초등학교 때 쓰던 전과가 떠오른다. 지금도 여전히 있는진 모르겠지만 동아전과, 표준전과가 양대 산맥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지금은 없을 것 같다. 정답을 요구당하며 사는 어린 시절이 지금은 좀 바뀌었으리라는 기대 같은 것으로 가늠해 보건데 말이다. 답을 보지 않으면, 그 절대적인 답이 붉은 글씨로 쓰여 있지 않으면 힘들어 하던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힘들어 하는 아이들을 견디지 못하는 부모들 때문에 전과는 만들어졌다.

 

 

이 절대적인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이들을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왔다. 아이들은 계산하거나 생각하지 않았고, 답을 적어오거나, 전과를 학교까지 들고 와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을 연습했다. 말하자면 착실한 필사였던 것이다. 수학숙제도 자연숙제도 전과가 대신 해주었고 아이들의 성적은 당연히 처참했다.

 

 

우스운 예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한 권의 책에 관한 비유에 그리 모자랄 것이 없다고 여겨진다. 절대적인 한 권의 책이 있어 철학, 인문학, 과학, 예술 등 학문의 전반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 한 권의 책만 섭렵하면 된다. 더는 책을 가득 채워 놓은 곳에 불과한 낭비되는 공간인 도서관이 사라져도 좋다는 것이다. 어떻게 될까.

 

 

세상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더 이상 소모하지 않을 것이고, 노력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멈추고, 당연했던 진리들의 소통마저 사라지고, 곧 세상을 지배하고 있던 에너지가 사라진다. 우주가 멈춘다. 우주가 사라진다.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책에 공간을 할애하고, 인터넷이 발전해도 책을 읽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모레티의 말처럼 모더니티는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에 불과해서 요즘 유행가는 2주면 수명을 다한다고 한다. 이제 모든 것들은 소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끈질긴 고민은 사라지고, 고뇌의 시간도 자취를 감춘다. 인간보다 더 긴 수명을 가진 것이 없는 시대에서도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만들고, 읽고, 쓴다.

 

 

어떤 시가 나이를 먹지 않는 것일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 시적 인식의 방향에 있어서 가장 멀리 나아간 경우가 그렇다. 이후 그를 따르는 후대의 시들이 그를 발판삼아 나아가려 해도 더 이상 거기서 나아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세계를 개화시킨 시들이 시대를 막론하고 현대시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발전이 아니라 모방을 낳는 시다.

 

 

그리고 현대시는 쓰여 진다. 현대의 사람들에 의해. 가치가 타락하고, 소모가 당연히 되는 이 와중에서도 창조는 이루어지고, 영속은 일어난다. 그래서 커서의 깜빡임에도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나조차도 여전히 이 앞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가 끈덕지게 이 위대한 파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들을 때 언제나 이 근본적인 파괴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들으며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쇼스타코비치를 좋아한다. 물론 대중적인 왈츠곡이나 겨우 바이올린 협주곡 정도를 즐겨 듣는 게 다이긴 하지만 말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시인처럼 파괴라는 파격적인 단어까지 가진 못했지만, 이것은 대단한 변주다 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전의 왈츠 곡이 따뜻한 오렌지빛의 불이 밝혀진 실내에서 여러명이서 군무를 추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곡은 ―그가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조용하게 눈이 내리는 고요한 숲의 한 가운데에서 남녀 한 커플이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좋아서 여전히 쇼스타코비치를 즐겨듣는데, 변주건 파괴건 마음에 와 닿는 것들은 형태를 거스르지 않는 변화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변주, 음표를 한 칸씩 내려 그려 보는 것, 이길 수 없었던 녀석을 간지럽혀 쓰러뜨려 보는 것, 대단히 꽉 차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쏟아버리는 것, 폐허가 된 자리에 나팔꽃 씨를 심는 것, 몸에 있는 홈들을 찾아보는 것, 모나리자의 코 위에 수염을 그려 넣고 그녀의 엉덩이가 뜨겁다고 쓰는 것, 응큼하게 가슴 위로 떨어진 은행잎을 책 사이에 끼워 보는 것.

 

 

시가 건너가고, 다시 건너오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시가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느끼게끔 해 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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