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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랭이님의 서재
  • 천천히, 스미는
  •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외
  • 13,500원 (10%750)
  • 2016-09-20
  • : 3,052

교양이 부족해. 어느 날 눈을 뜨고 생각했더랬다. 어떻게 해야 교양 있는 사람―교양 넘치는 사람이 아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다―이 될까 고민이 됐다. 무턱대고 덤비기로 했다. 그러나 교양이라는 거대한 산은 길이 너무 많고, 정상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서 내가 든 길이 제대로 든 길이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상을 보며 오르려고 해도 구름에 가려진 탓에 정상을 보지 못하니 가고 있는 길이 오르는 길인 건지 샛길로 빠진 건지 그마저도 아니면 하강하고 있는 건지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뭐든 봐야 했다. 교양을 위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부끄러움을 아는 부끄럼 많은 사람이므로 도서관에 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강원택著 「정당은 어떻게 몰락하나?」 집어들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었다. 정말이다. 재미있어서 멈출 수 없었다. 휘그파와 토리파에 이어서 보수당 자유당이 등장하고, 계속 이어지는 정당정치 내용을 따라가는 건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영국의 조지와 윌리엄에 대한 사랑(그러니까 조지와 윌리엄이 너무 많아!) 때문에 혼란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윌리엄은 아까 그 윌리엄이 아닌 거지? 아니야, 아까 그 윌리엄이야.

 

처음에는 재미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졸음이 쏠렸고, 졸음을 이겨내자 눈이 퀭해졌다. 이제는 의식 없는 의식만이 남아 책을 읽어갔다. 이 기분에 대해서 많은 이들은 알 것이다. 또렷한데 뚜렷해지지 않는 기분. 그 때문에 나는 페이지를 다시 돌아가야 했고, 또 다시 돌아가야 했고, 그렇게 반복하며 더듬더듬 책을 읽어갔다.

 

눈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등도 아프고, 그냥 온몸이 아픔을 호소할 때에 이르러 신착도서란에 이 책을 보았다. 주인공의 등장이 너무 늦었을까? 바로 「천천히, 스미는」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나는 손을 저었다. 이 역시도 정말이다. 대신 휴대전화 메모장에 얼른 제목을 썼다. 잊지 말고 나중에 읽을 요량이었다. 당장은 짧은 책 한 권이 절실했다. 그렇게 돌아섰는데 자꾸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아, 그때부터였나보다. 나는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결국 등을 돌려 책을 꺼냈다. 읽으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훑어만 보려고 했다. 산문이라고? 에세이는 취향이 아닌 걸. 그렇게 생각하며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외쳤다(속으로!). 이건 반칙이야.

 

맨 첫장이 버지니아 울프라니! 제목도 '나방의 죽음'이 아닌가. 첫문장은 허를 찌른다. '낮에 나는 나방은 나방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다시 한 번 외쳐야겠다. 이건 반칙이야! 어떻게 이 문장을 읽었는데 다음 문장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결국 굴하고 말았다. 그리고 늦은 밤까지 건조해진 눈동자를 굴려가며 읽어야만 했다.

 

여기서도 윌리엄이 때때로 등장해 나를 긴장하게 했지만, 여기의 윌리엄들은 생생한 나머지 그들의 내면을 훑어보는 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 책을 읽는데 왜 허기가 가실까. 나는 100년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 시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았고, 그 시대의 사회를 보았다. 그 시절의 문화를 보았고, 그 시절의 생각을 보았다. 나는 작가들의 사유를 너무나도 온전히 주워먹고 있었다. 심연의 깊이를 담담하고 솔직하게 풀어낸 에세이를 통해 넙죽넙죽 편하게도 받아먹었다. 한 번쯤은 해보았을 법한 고민들이었다. 그 고민들을 저자들도 하고 있었다. 내 고민을 저자들이 대신해 주었고, 내 고민의 해법을 그들이 대신해 찾아보았고, 사유의 헤맴에서 만날 수밖에 없는 좌절과 고통, 쾌감을 이미 100년 전에 하고 있었다. 이건 꽤나 분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었다. 이 고리가 저자들과 나라는 사람을 잇는 굵은 대칭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버지니아 울프의 글에서 많은 고민을 했고, 맥스 비어봄의 글에서 외로워졌고, 도로시 세이어즈 글에서 반성했고, 제임스 서버와 마크 트레인에서 웃었다. 군데군데 보이는 불명확한 번역에 당혹감도 느꼈으나 즐거운 시간이었다.

따라서 인간미 없는 차갑고 고립된 활자로 이런 흥분을 싹 틔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싹 틔운 불멸을 함께 누린다. 언젠가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때가 되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차가운 활자로 고립되어 안전하게 남은 그것은 그가 숨 쉬고 고뇌하던 공기로부터 여러 세대 떨어진 사람들의 심장과 샘에 여전히 오랜 불멸의 흥분을 싹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번 가능했다면 자신이 죽어 희미해진 이름으로만 남은 지 오랜 뒤에도 여전히 가능하고 효력이 있으리라는 걸 그는 안다. ―윌리엄 포크너
우리는 너무 많이 읽다보니 감탄할 시간이 없고
너무 많이 쓰다보니 생각할 시간이 없다. ―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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